장재형목사- 청지기 의식

1.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의 연관성, 잃어버린 자와 부자를 향한 메시지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그리고 탕자의 이야기를 통해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마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 그리고 잃어버린 동전을 애타게 찾던 여인의 모습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열정과 기쁨을 보여줍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탕자의 비유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아버지 집을 떠나 방탕에 빠질 수 있는지를 잘 그려내면서도, 결국은 다시 돌이킬 길이 열려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들은 자기 뜻대로 먼 나라에 가서 재산을 탕진했으나,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해 굶주림과 비참함에 처했을 때 비로소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결국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넓은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5장을 통해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드러내셨다면, 이어지는 누가복음 16장은‘부자’, 곧 무언가 가진 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5장에서 탕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탕자의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 등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큰 자비와 관용을 품고 있는지 강조했다면, 16장에서는 그‘자비로움을 배운’ 이들이 실제로 무엇을 가지고 있을 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즉,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너희도 본받으라”고 하신 후, 실제로 자기 손에 어떤 ‘소유’를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소유를 어떻게 처리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누가복음 16장에는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이 둘은 모두 ‘가진 자’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는 끝내 나사로를 돌보지 않음으로써 지옥에서 고통받는 부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에서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던 청지기가 어떻게 행동함으로써 칭찬을 받게 되는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재물’과 ‘소유’를 대하는 태도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16장의 말씀을 읽는 이들 중에는, 자신이 물질적으로 부유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부자를 향한 말씀은 나와 관계가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비유는 단순히 거부(巨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맡겨진 자’, 곧 청지기적 위치에 있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짚어내며,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 받은 재능과 은사, 기회나 권한 등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이것이 비단 거금(巨金)의 소유 유무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이 있건 없건 간에, 우리가 현재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15장에서 가르친 ‘자비와 관용’이 실제로 16장에서 ‘재물을 대하는 태도’로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은 이러한 이유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15장에서 모든 소외된 자, 낙오된 자, 탕자에게까지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과 용서가 강조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배운 바 있는 우리도 타인을 향해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함을 예수님은 역설하십니다. 그리고 곧장 16장으로 이어지면서, “너희가 가진 것이 있을 때, 그 가진 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구체적 생활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15장에서 배운 자비와 용서가 단지 입술의 고백과 이론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16장에서 실제 삶 속에서 적용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연결고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연결점을 강조하며, “우리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가는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면서 동시에 우리 손에 주어진 재물, 시간, 재능, 관계 등 모든 것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15장에서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배웠다면, 16장에서는 ‘너희 또한 이러한 마음으로 너희 것이 아닌 하나님의 소유를 베풀어라’라고 예수님이 도전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단순히 ‘남을 잘 돌보자’, ‘소외된 자를 외면하지 말자’라는 규범적인 명령을 넘어, 실제로 우리 삶 속에 임한 물질과 재능, 권위를 어떻게 행사하느냐의 문제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모습은 ‘잃어버린 자’라는 상징성을 지닙니다. 이 탕자는 자기 힘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얻었다거나, 그 재산을 벌어들였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재물을 제멋대로 쓰다가 결국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은 비참함 가운데서라도 아버지를 기억해냅니다. 이처럼 결국 인간은 ‘내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전부 ‘아버지께 받은 것’이며, 그 소유는 언제든 거두어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아들은 돌아올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었음을 나중에야 깨닫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네 죄를 다시 한 번 꼼꼼히 따져보자’ 하지 않고, 그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아들을 끌어안고 기뻐했습니다. 이처럼 15장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자’, ‘소외된 자’, 심지어 방탕한 탕자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생생히 전해주죠.

그렇다면 16장은 그와 반대로 ‘잃어버린 자가 아닌 가진 자들’을 향해 말씀하심으로써 완결성을 이룹니다. 15장에 도달한 이라면 누구나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경제적·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은 아닙니다. 반면 16장에서는 “혹시 너희가 부유해진다면, 혹은 이미 무언가를 책임지고 있는 ‘청지기’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는 일, 나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시간, 건강, 재능, 관계, 직분 등—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관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것이 16장의 핵심입니다.

더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16장의 말씀은 교회 안의 신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진 말씀이며, ‘부자’라고 명시된 대상을 단순히 세속적인 큰부자 혹은 탐욕스러운 억만장자로 제한해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있는 누구도‘나는 전혀 가진 것이 없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많든 적든, 재능이 풍부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든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은혜와 소유를 위임받은 청지기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직접적인 적용이 가능합니다.

15장 마지막 부분을 다시 떠올려 보면,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사실상 다 주고서라도 ‘아들이 돌아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던 큰아들은 내심 불만을 품었죠. “나는 이렇게 충성스럽게 집에서 일해왔는데, 왜 동생에게만 잔치를 베푸냐”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장면에 이르면, 누가복음 16장을 맞이하기 전에 이미 우리 안에서 묵직한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과연 아버지의 마음으로 내 동생, 혹은 주변 사람들을 품어주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내 몫’과 ‘내 소유’에 대한 개념은 혹시 내 욕심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닌가?’ 하는 질문들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곧바로 다음 장인 누가복음 16장에서 ‘청지기 의식’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다뤄지게 됩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용과 극진한 사랑’을 가르치고, 그로부터 배우는 자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16장은 그 자비를 실제로 재물과 생활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지를 가르치는 ‘실천적 지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맥락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15장까지 읽고서는 은혜롭다고 감탄하면서, 막상 16장에 와서 ‘옳지 않은 청지기’나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심판적, 경고적 메시지를 접하면 거북해하며 회피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15장을 통해 배운 바를 땅에 내려놓고, 우리의 삶에서 책임져야 할 ‘재물’과 ‘소유’의 문제를16장에 적용해 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쪽만 붙든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15장에서 얻은 결론, 곧 ‘소외된 자와 잃어버린 자에게 베풀어야 할 자비와 은혜’를 실제 삶, 구체적으로 내가 맡은 재물과 소유, 혹은 권한과 직분의 영역에서 어떻게 펼쳐내느냐가 16장의 주된 과제이자 메시지가 됩니다. 이 두 장을 분리하여 따로 읽기보다는, 연속선상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된 흐름으로 읽고 묵상할 때,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욱 명확하고 실천적인 차원으로 다가옵니다.

결국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의 연관성은, “잃어버린 자를 돌보는 하나님의 자비”에서부터 “부자가 되었거나, 무언가를 맡고 있는 청지기인 우리가 그 자비를 실제로 어떻게 행할 것인지”로 나아가는 성경 본문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짚어냄으로써 드러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실제 생활의 접목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자비와 사랑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실제 자리는 재물, 시간, 재능, 권위를 사용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둘이 분리되어 따로 존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고, 우리가 삶의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15장과 16장을 이어서 말씀해 주신 것이지요.

2.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청지기적 삶의 적용

누가복음 16장 1절부터 13절까지 기록된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는 성경 전체에서 해석하기 가장 난해한 비유 중 하나로 꼽힙니다. 특히 8절에서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많은 독자가 “어째서 불의한 일을 행한 자가 칭찬받을 수 있는가?”라는 난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무엇을’ 칭찬하셨는지, 그리고 이 비유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어떤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인지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비유의 골자는 간단합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는데, 이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이야기가 주인의 귀에 들어갑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서 “네가 어떻게 나의 재산을 낭비할 수 있느냐, 이제부터는 청지기 직무를 더 이상 맡지 못할 것이다”라고 통보합니다. 해고 위기에 처한 청지기는 속으로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길거리에 나앉자니 창피하다’라며 고민합니다. 그리고 궁리 끝에 ‘빚진 자들을 불러, 주인이 빚진 금액을 깎아주겠다’며 증서를 다시 써 주도록 시킵니다. 기름 백 말(斗) 빚진 사람에게는 ‘빨리 오십이라고 쓰라’고 하고, 밀 백 석 빚진 사람에게는 ‘팔십이라고 쓰라’고 하며, 주인의 재산을 더 마음대로 감해주고 맙니다. 분명히 이 행동은 또 다른 차원의 불의이자 ‘주인의 허락 없이’ 재산을 삭감해버리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8절에서 예수님이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주인은 청지기의 불의를 칭찬한 것일까요? 아니면 청지기가 보여준 ‘어떤 면’을 칭찬한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청지기가 자기 앞에 닥친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했다”는 ‘지혜로움’을 칭찬한 것이라는 결론으로 모입니다. 즉, 청지기의 행동 자체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재빨리 ‘장래를 도모’하고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뒀다’는 점을 들어 ‘이 세대의 아들들은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눅 16:8)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도 자기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앞일을 대비하여 기민하게 움직이는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너희는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얼마나 더 지혜로워야 하겠느냐”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지혜’는 어떤 방향성을 가질까요? 이어지는 9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앞선 청지기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주어진 상황에서 “너희가 세상 재물을 가지고 네 이웃에게 호의를 베풀고, 남들에게 유익을 끼치라”는 뜻의 권면입니다. 쉽게 말해, “어차피 너희가 가진 재물은 영원하지 않으니, 그 재물이 사라지기 전에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내라. 그러면 너희가 나중에 하늘나라에 이를 때, 너희가 도와주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영원한 처소’에서 너희를 반겨줄 것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청지기 의식’의 핵심으로 봅니다. “우리는 재물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잠시 관리할 수 있는 기회를 받았을 뿐이다. 따라서 재물을 쌓아두거나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풀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도록 하라”는 것이 청지기 의식의 바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청지기가 보여준 것처럼, 어떤 면에서는 ‘과감한 결단’도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청지기는 비록 불의한 방식으로 행동했지만, 적어도 ‘미루거나 주저하지 않고 신속하게 행동’했고,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다’는 점을 예수님은 ‘지혜롭다’고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방법으로 그렇게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도전하시는 것이지요.

10절 이하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돈이나 재물과 같은 ‘작은 것’부터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큰 것’, 곧 영원한 가치를 맡기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재물에 대한 태도 하나에도 우리의 영성이 담긴다. 단순히 ‘돈’이라고 해서 영적인 문제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이 땅에서의 소유를 사용하느냐를 보고 계시며, 그에 따라 우리에게 더 큰 영적 책임을 맡길 수도, 혹은 아예 거두어가실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2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남의 것’이란 무엇일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재물과 소유는 근본적으로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잠시 맡기신 것’이기에, 곧 우리는 남의 것을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라는 사실이 명백해집니다. 그러므로 ‘내 것’이라 주장하는 소유에 대한 욕심이나 집착은 결국 착각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13절)라고 못 박으신 것도 이 맥락과 이어집니다.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마치 그것이 나의 영원한 주인인 양, 나에게 절대적 통제권이 있는 양 매달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주인보다 앞설 수 없고, 주인의 뜻과 다른 방식으로 재물을 쓰는 것은 결국 잘못된 길임을16장은 강력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통해 말씀하시는 바는, 첫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의 환경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준비 없이, 무책임하게 시간을 흘려보낸다면, 막상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둘째, 그 지혜로움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비추어진 지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교활한 방법을 쓰거나, 불의한 이익을 취하는 식의 ‘거짓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언젠가 모든 것을 정산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금 우리가 가진 것으로 다른 이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일이 참된 지혜입니다. 셋째, 그렇기에 우리는 언젠가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관리 책임을 주님 앞에 보고드려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곧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교회와 사회 속에서 맡은 직분과 역할, 재정, 시간, 재능 등에 대한 전방위적인 적용을 요구합니다.

비유의 내용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것을 개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실천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혹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가, 재산이 있는가, 혹은 리더의 위치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왕 맡겨주셨으면, 부디 옳지 않은 청지기처럼 불의하게 관리하다 해고당할 위기에 놓이지 말라. 대신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지혜롭고 옳은 청지기’가 되도록, 늘 관용과 사랑으로, 그리고 확고한 책임감으로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람들과 재물을 돌보라.”

15장에서 배웠던 하나님의 관용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재물을 인색하지 않게 사용하는 태도”가 필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시고, 소외된 자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닮으려면, 그 마음을 실천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줄 물질과 재능, 시간,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아낌없이 활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소유를 꼭 쥐고 놓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할 기회를 스스로 봉쇄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내가 수고해서 번 돈이니, 내 마음대로 써야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결국은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니,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로 사고방식을 전환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강조하며, “인생의 한순간, ‘이제 내가 맡긴 것을 그만 거두어라’라는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들릴 때가 누구에게나 온다. 재물을 잃을 수도 있고, 건강이 쇠퇴할 수도 있고, 심지어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 땅에서 누리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그것을 사용했는지가 낱낱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아직 우리가 시간을 부여받은 지금, 우리가 청지기로서 맞닥뜨릴 ‘정산의 순간’을 염두에 두고 지혜롭게 재물과 기회를 사용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나아가 ‘옳지 않은 청지기’가 빚진 자들의 빚을 삭감해주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자비롭게 베푸는 것”의 중요성도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부정한 의도로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그렇게 했고, 그것 자체가 의로운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그 장면을 통해, ‘네 재물이 아니지만, 네가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호의와 자비를 베푸는 것이 주인(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태도’임을 강조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부정행위’라는 부분은 비유적인 설정일 뿐, 예수님이 우리의 불의를 찬성하시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핵심은, “네가 관리하는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고, 그들이 영접하게 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지혜라는 점입니다.

이를 우리의 교회 생활에 적용해 본다면, 교회 안에서 재정을 집행하는 이들은 물론, 봉사 리더십이나 교육 리더십을 맡은 이들, 혹은 교회 외부에서 사회적 지위나 직책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들도, 모두 자신에게 위임된 권한과 자원을 어떻게 ‘이웃의 빚을 덜어주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쓸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때 자칫 우리의 마음속에 ‘이건 내가 힘들게 일해서 얻은 위치이니, 내 만족을 위해 써야 해. 왜 남들을 위해 써야 하지?’라는 의심이 고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6장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준엄한 메시지는, “결국 그 모든 것은 네 것이 아니며, 주인이 이미 언제든 거둬갈 수 있는 것이니, 오히려 필요한 곳에 베풀며 살아라. 그래야 후에 너에게 큰 칭찬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13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돈을 섬긴다는 것은 곧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를 하나님이 아닌 재물로 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재물이 우상으로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의도치 않게 하나님을 뒷전에 두고, ‘재물을 더 모으는 것’에 골몰하게 됩니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고, 그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활용하는 ‘도구’가 될 때 비로소 참된 의미를 찾습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공동체가 재정 문제로 갈등이 생기고, 성도들 간에 물질 문제가 얽혀 시험에 들 때가 있는데, 그 모든 갈등은 결국 ‘내 것’이라는 소유욕과 권한 집착에서 기인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청지기 의식’을 바르게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재물의 문제에서 서로 연합하고 협력하여,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하루하루를 주시하며, 과연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고, 우리의 기회를 활용하며, 재물을 사용하는지 면밀히 바라보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열심히 배우면서도, 정작 재물을 관리하는 방식에서 불의하고 탐욕적이라면, 그 신앙은 공허한 외침으로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뿐 아니라, 우리의 ‘지갑 사정’, ‘삶의 씀씀이’, ‘이웃과의 거래 방식’, ‘약자를 대하는 태도’ 등 구체적인 영역까지도 ‘주님 보시기에 옳은가’ 하며 판단하신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했다”고 칭찬하신 그 지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비를 실천하고, 미래를 준비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투자를 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삶의 마감 순간이 찾아왔을 때, 혹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지혜와 실천이 빛을 발하도록, 지금 맡긴 것들을 아낌없이 베풀며, 작은 것부터 충성되게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15장에서 배운 ‘잃어버린 자를 향한 자비’의 연장선에 있는, 진정한 청지기의 삶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요약해, “탕자의 비유에서 보았듯이,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버린 탕자라도 아버지께 돌아가기만 하면 풍성한 사랑을 입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손에 쥔 모든 기회와 자원을 통해 동일한 자비와 은혜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가 교훈하는 것은 단순히 “나쁜 행동을 해서 이익을 챙겨라”가 아니라, “너희가 관리하는 것이 사실 너희 것이 아니므로, 인색함을 버리고 자비롭게 베풀되, 지혜롭게 행동하라. 그리고 너희가 어느 날 이 땅의 청지기 직분을 내려놓게 될 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참된 것(영원한 상급)을 맡기실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빛의 아들들’인 우리보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더 지혜롭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받은 이들이 세상 재물을 다루는 데 있어,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둔감하고 소극적이거나, 때로는 부정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이 땅에서의 재물에만 붙들려 마음이 어두워진다면,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청지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15장에서의 아버지 마음을 배우고, 16장에서의 청지기 의식을 충실히 내면화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많은 이에게 복을 주실 것이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처소에서의 기쁨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에 담긴 핵심 메시지, 곧 청지기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배웁니다. 장재형목사는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의 이러한 연결 고리가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것을 우리 삶의 구체적인 재물·소유·직분 영역에서 실천하는 청지기적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본래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아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 상급’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이 땅을 떠납니다. 그때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가 베푼 사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열매뿐입니다. “청지기적 삶은, 그 열매가 아주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이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자, 누가복음 15~16장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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