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 장재형목사

1. 사도행전의 핵심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역사와 복음이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책으로,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함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실제로 초대교회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여겼던 그룹도 있을 만큼, 이 두 권에 대한 이해는 초기 신앙 공동체의 뿌리와 신앙유산을 살펴보는 핵심 열쇠가 된다. 나아가 신약성경 중에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까지 총 다섯 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역사를 잇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내용을 되새길 수 있을 만큼 숙지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독교 신앙에 필수적이다.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예루살렘을 비롯해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에 퍼져나가고, 마침내 땅끝까지 확산되는 역사가 다채롭게 담겨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바울 사도가 등장하여 복음을 유럽 대륙으로까지 전파해가는 여정이 비중 있게 다뤄진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한 이방인에 대한 복음의 확장, 여러 도시에서의 선교와 박해, 교회 설립, 바울의 옥중 사역 등이 총 28장에 걸쳐 자세히 전개된다.

이처럼 사도행전을 숙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아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 현실 세계 속에서 어떤 역사를 일으키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초기 제자들에게 직접적인 음성 또는 환상, 감동, 막힘 등을 통해 선교의 방향을 정해주셨다. 고린도나 빌립보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는 한편, 비두니아로는 가려 해도 길이 막히는 모습에서, 성령께서는 언제나 무작정 ‘열어주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막으시는 분’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는 현대 신앙인이 자기 인생에서 경험하는 진로나 사역의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을 심도 있게 묵상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도행전 16장에서의 바울 일행의 2차 선교여행 과정이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행 16:6)”,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7)” 등의 말씀은, 바울이 준비하고 계획했던 길이 막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가고자 하는 선교지였으나, 성령께서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결국 바울은 드로아에 이르러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청하는 환상을 보고, 서쪽인 유럽 대륙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이를 통해 그 유명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면서 복음이 서방 세계로 본격 진출하게 된다.

이 장면은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타이밍’이 역사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 깊이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장재형(장다윗) 목사를 비롯한 여러 목회자들 역시 이 원리를 신앙과 교회의 실제 사역에 적용하려 시도해 왔다. 선교와 개척의 방향을 결정할 때, 자신에게 열려 보이는 길이 있더라도, 때로는 성령께서 친히 다른 길을 예비해 두시는 경우가 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많은 선교사가 특정 지역으로 가려 했으나 때로는 질병, 재정 문제, 환경적 문제 등으로 문이 막히고,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신 다른 지역으로 선교의 장이 옮겨간 후에 더 큰 열매가 맺힌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 이는 “내가 원하던 길이 막히면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종말론적 예언과 가르침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부분은 올리벳담화(Olivet Discourse)로 알려져 있다. 마태복음 24-25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에 공통되게 기록된 이 담화는, 예수님께서 감람산(올리벳산)에서 말세에 일어날 징조들을 예언하신 자리에서 비롯되었다. ‘감람산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마 24:3) 제자들의 질문, 즉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는 물음에 답변하시는 형태로 전개된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거짓 messiah’들이 등장하고,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미혹을 일으키며, “나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 경고하신다. 다시 말해 오직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지만, 세상의 끝에 가까울수록 다양한 이단적 가르침이나 대안적 길이 등장하여 혼합주의나 다원주의(Pluralism)를 표방할 것이라 하셨다.

현대 사회의 사상적 흐름인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회의주의에 기반하여, 모든 것은 해체되고 모든 진리는 상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의 절대적 진리 대신 다양한 진리가 공존할 수 있으며, 어느 길을 택하든지 모두 유효하다”는 다원주의가 팽배해진다. 이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라는 사도행전 4장 12절의 선포처럼, 오직 예수 안에 구원이 있음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이다. 올리벳담화에서도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이 혼란에 빠지지만, 진리를 견고히 붙드는 자만이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Only Jesus(오직 예수)’ 신앙을 견지하는 것은 종말론적 신앙의 핵심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과 예수님의 ‘오직 한 길’ 사상을 설파하며, 교회가 자칫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적 사고에 물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인간이 자유와 다양성을 표방하며 만들어낸 수많은 ‘대체 길’들은 결국 하나님 없는 길이 될 위험이 크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별설교(요한복음 14장)와 산상수훈, 올리벳담화를 통해 직접 경고하신“마지막 때의 미혹”에 대응하는 핵심 무기는 오직 말씀과 성령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서 어떻게 복음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전통적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은 ‘성경으로 돌아가자’(Sola Scriptura)는 것이며, 이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진리를 지키고 전파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 본질을 붙드는 태도에 있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개혁교회는 더욱 성경에 가깝게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이유도, 교회가 식어지는 것을 막고, 종말을 대비하는 올바른 신앙 자세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라고 하신 예언이 오늘날 교회 내에 실현될 수 있음을 본다면, 진리 안에 굳게 서는 것이 곧 우리 영혼의 ‘온도’를 지키는 방법이다.

결국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성령이 주도하시는 복음 전파”이며, 이는 올리벳담화 등 예수님의 예언적 말씀과 하나로 이어진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선언은 곧, 복음 전파가 종말론적 시계의 결정적 요소임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건너갔듯, 오늘날 성도들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으므로, 교회는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세상의 탄식을 부지런히 듣고 달려나가야 한다.

특히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피조물이 있다”(롬 8장)를 상기시키며, 전 세계가 복음을 기다리는 마게도냐 사람 같은 절실함을 품고 있다는 점을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원은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이 회복되어야 할 근본 문제로, 온 세상의 모든 ‘고장 난 창조물’을 다시 제대로 작동하게 하려면 설계자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간의 근본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이 길을 알리고 전하는 것이 교회 본연의 사명이다.

2.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난 바울의 마게도냐 환상은 초대교회 선교 역사의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동쪽으로 가고자 애썼으나 길이 막혔을 때, 바울은 서쪽 유럽으로 향한다는 확실한 인도하심을 받았다. 이로 인해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비롯한 사람들과 만나 교회가 세워지고, 바울의 영향력은 그리스를 지나 로마에까지 미치게 된다. 바울이 소아시아 중심의 선교에 머물렀다면, 기독교는 훨씬 더 제한된 구역에만 머물렀을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의 지형을 뒤바꾸며 복음을 서방 세계로 크게 확장시켰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사도행전의 흐름 속에서, 오늘날 미국이 지닌 선교적 위치와 의미를 주목한다. 미국은 한때‘복음주의’(Evangelical) 성향을 강력하게 보유했고, 수많은 선교사를 전 세계로 파송하면서 기독교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으로 인해 미국 교회가 부흥했고, 세계 교회의 선교를 견인하는 중심축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미국 교회가 세속화, 다원주의, 자유주의 사상의 침투로 점차 약화되어 가며, 한때의 영적 활력을 잃는 양상에 놓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예언자적 시선으로 보면, 이는 이사야서에서 경고된 “네 포도주에 물이 섞이고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다”(사 1:22)는 말씀처럼,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릴 때 생기는 영적 퇴조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교회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이사야 6장 13절 “그 중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는 말씀처럼, 포도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아직 남아 있는 그루터기가 있듯이, 여전히 복음의 불씨가 살아 있는 교회들과 지도자들이 존재한다. 장재형 목사는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바울 시대의 부르짖음이 오늘날에도 울려 퍼진다고 주장한다. 곧, 과거에 미국이 전 세계를 향해 선교사를 파송하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교회를 다시 견고하게 세우고, 그 불씨를 되살려서 다시금 온 세상에 복음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한국의 기독교인, 혹은 다른 나라 출신의 복음주의자들이 미국 여러 주(state)에 교회를 개척하고, 새로운 모델을 세우면서 차세대 부흥의 불씨를 피우려 노력하는 흐름이 점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 곳곳에서 고립되어 있던 한인교회나 소수민족 교회가 보다 활발히 움직이고, 다민족 교회로 성장하거나 주류 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관찰된다. 중요한 것은 이 움직임이 단순히 ‘민족적 우월감’이나 ‘문화적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가진 보편적 능력을 다시금 확인하고, 미국 사회 속에서 복음을 회복하고 확산하는 데 목적을 둔다는 점이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사도행전 16장의 말씀은 오늘날 미국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나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지역은 복음이 이미 들어가 정착한 듯 보이지만, 실제론 문화적·사상적 왜곡이나 교리적 타협으로 인해 영적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땅을 회복시키기 위해, 거룩한 씨를 다시 심기 위해,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여 건너와 달라”는 요청이 생긴다. 교회가 이 부름에 민감하게 응답할 때, 성령께서 역사의 방향을 전환시키신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의 교회가 식어지고 있지만, 주님은 계속해서 교회를 새롭게 하심으로써 역사를 이끌어가신다”고 설파한다. 전 세계에서 모인 이민자 공동체나 복음에 다시 눈을 뜬 사람들이, 50개 주(州)에 교회를 개척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실질적으로 선교 지형을 바꾸고, 지역 교회를 통해 ‘네트워크’가 확장될 때, 비로소 새로운 복음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본 후 빠르게 반응했듯이, 교회 공동체도 시대적 소명을 감지하고 신속하게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른바 “미국이 선교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는 선언은 교회 내부에서, 그리고 선교단체나 신학교, 각 교단에서 자주 들려온다. 예전에는 미국이 ‘선교를 보내는’ 국가였다면, 이제는 ‘선교가 필요한’ 국가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국내외 기독교인들이 힘을 모아 “다시 예언하라, 다시 복음을 외치라”는 사명을 붙들게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 10장 11절의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구절이 현대 선교적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두고 “복음이 이미 들어간 곳도 사실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라고 해석한다.

앞서 말한 포스트모더니즘, 다원주의, 자유주의 신학, 세속화 등의 흐름은 미국 교회를 비롯해 전 세계의 교회를 흔들고 있다.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존재하지만, 내적으로는 말씀과 성령의 불이 식고, 복음의 능력이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것이 곧 “포도주에 물이 섞인” 상태이고, 영적 힘을 잃어버린 상황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때일수록“거룩한 씨”로서 주님이 사용하시는 자들이 도드라지게 된다. 크고 소리에 요란한 군중이 아니라, 작은 숫자지만 “십분의 일” 혹은 그 이하의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계속 새 일을 행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성경적 원리와 교회사를 접목시키면서, 진리의 성령이 임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베푸신 사랑을 끊임없이 기억나게 하시고, 우리를 식지 않게 하신다”고 강조한다. 선교사나 목회자, 교회 개척자들은 하나님이 신실하게 보내시는 사람들이다. 종종 열악한 환경에서도 과감히 나아가 교회를 세워왔는데, 이는 바울이 열병에 걸리고, 동역자들이 떠나가며, 길이 막혀도 다시 일어섰던 사도행전적 선교 정신과 맞닿아 있다.

미국 각 주에 교회들을 개척하는 계획도 동일한 맥락이다. 어떤 지역은 기존 교회가 약화되었고, 복음이 동력을 잃어버린 상태일 수 있지만, 그 지역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면, 그곳은 다시 한 번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영적 외침을 발할 수 있다. 이 외침에 응답해 교회 개척과 복음 전파가 이루어질 때,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선교가 확산된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한때 주춤했던 복음주의가 되살아나고, 교회가 “전선으로 나가는” 선교적 엔진 역할을 하게 된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에 단순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 이상으로, ‘종말의 시점’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 말씀 안에는 “세상의 끝이 임박했다면, 너희는 더욱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들어 있다. 한마디로, 복음이 온 세상에 증언되는 과정을 방해하려는 세력도 있을 것이고, 역사적·문화적 난관도 많지만, 이 사명을 완수하려 애쓸 때 비로소 종말이 온다는 희망적 전망이 깔려 있다.

역사적으로도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시기에는 반드시 복음 전파와 파송(선교)이 동반되었다. 18~19세기에 영국이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보낼 때, 국내에서는 감리교나 장로교 등 개신교 교단들이 크게 성장했고, 미국에서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에도 내부 영적 갱신과 함께 해외 선교가 활발했다. 이처럼 교회가 자기 울타리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선교적 마인드를 품을 때, 성령의 역사가 함께 움직이는 사례가 많았다.

장재형 목사 역시 “교회가 식어지면 안 된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며, “선교와 복음 전파에 끊임없이 참여하지 않는 교회는 결국 식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오직 한 길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멈추면, 교회 내부의 영적 열정은 서서히 식어버리고, 세속적 사고방식이 교회를 잠식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경고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곧 ‘영적 활력의 회복’과도 직결된다. 교회가 자꾸 바깥으로 나가고, 새로운 영혼을 품으며, 세상 한가운데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진리를 나눌 때, 교회의 내부 온도 역시 뜨거워진다.

이처럼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는 요한계시록적 사명과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사도행전적 요청이 맞물리면, 현대 기독교의 선교 지형은 놀랍게 변모한다. 지역교회가 막혔던 담을 허물고, 다른 도시나 다른 국가로 건너가서 개척을 돕거나, 함께 예배하고, 다양한 사역을 공유하게 될 때, 포스트모더니즘과 세속화가 만들어낸 무덤 같은 상황을 되살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밤에 환상을 보고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행 16:9-10)는 구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이며, 교회는 일종의 ‘바울 공동체’가 되어, 성령의 인도에 따라 박차고 나아가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선교적 열정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실제로 수많은 교회 개척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지원해 왔다는 점이 자주 회자된다. 여러 지역에서, 혹은 여러 나라에서, 개척 상황에 놓인 교회들에게 필요한 자원과 인력을 파송하고, 선교 전략을 공유하며, 신학교육을 제공하거나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다양하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오직 예수” 복음을 증거하는 공동체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사역의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주도한다”가 아니라“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마치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을 때 예수의 영이 막으셨고, 대신 마게도냐로 향하게 했듯이, 선교사들은 끊임없이 기도하며 길이 막힐 수도 있음을 유념하고, 그때마다 더 열린 길을 찾으며 신속히 움직인다.

물론 이런 대규모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도전이 많다. 재정, 인력, 현지 언어와 문화, 법적 문제 등 숱한 장애물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신 때가 있고, 예비하신 땅이 있다”고 강조하며,그러한 고난의 길을 ‘믿음의 훈련 과정’으로 바라보라고 권면한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아 흩어졌을 때, 그 흩어짐으로 인해 사마리아와 이방 땅에 복음이 더욱 확산된 것처럼, 고난이나 어려움은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지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늘 던진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중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고, 부활 승천 직전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당부하셨다. 이는 곧,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과 방향을 정확히 요약한 말씀이다. 이 방향을 잃어버린 교회나 개인은 결국 세상적 가치관에 치우치고, 영적 생기를 상실하게 된다.

미국이건 아시아건 아프리카건, 어디든지 간에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절박한 외침이 들리는 곳이라면, 교회는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로부터 이어지는 ‘사도행전적 선교 유산’이며, 올리벳담화가 제시하는 ‘예수님의 종말론적 예언’을 완성해 가는 길이기도 하다. 결국 종말은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오기에, 교회는 게으를 틈이 없다. 길이 막히거나 방향을 잃었을 때도, 성령께서 여시는 문을 끝까지 찾고, 거기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현대에 이 사명을 이어받아, 교회 개척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나 선교 전략이 제시되고 있다. 온라인 사역, 다민족 사역, 이민자 사역, 대학 사역 등, 시대와 장소에 따라 맞춤형 방법론도 얼마든지 시도되고 있다. 그럼에도 본질은 하나다. “오직 예수”가 유일한 길이며, 아무리 사상적·문화적 도전이 심해도, 예수 외에는 다른 이름이 없다는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 본질을 사수하지 못하면,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에 덮여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이 본질을 붙든다면, 교회는 반드시 부흥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와 세미나, 집회를 통해 강조해 온 핵심 중 하나도 이것이다. “예수 외에 다른 이름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단호히 싸워야 한다. 그러나 종말론 해석, 전천년설·후천년설·무천년설 같은 논쟁은 교회 내 해석 차이로 인한 것이기에 그 자체로 정죄할 대상이 아니다. 종말론적 방법론은 다양할 수 있으나, 구원론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논리는, 복음의 단일성과 포용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태도다. 전천년이든 후천년이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을 예로 들어 다시 생각해보면, 한때 전 세계에 선교사를 대규모로 파송하던 교회가 이제 침체기에 접어든 지금,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 성도들을 통해 새로운 ‘선교의 바람’을 일으키고 계실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선교의 목적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내 지역교회’다. 이것은 선교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만 일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복음은 어느 한 지역에만 머물지 않았고, 한쪽이 식어지면 다른 쪽을 통해 새 불씨가 옮겨져 활활 타오르곤 했다.

그러므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요청은 결코 옛날 사도행전에나 어울리는 옛말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교회는 ‘이제 내가 건너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날마다 기도하고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막혀 있는 듯 보여도, “성령이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가 있을 수 있으며, 반면 어디선가 간절히 손짓하며 “도우라” 요청하는 환상을 보여주실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바울과 같이 즉시 순종하는 태도다. “밤에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행16:10)라는 구절은, 신앙의 실천이 지체 없이 이뤄져야 함을 가르쳐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와 같은 ‘빠른 순종’을 강조하면서, “상황이나 여건이 완벽하게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면 기회는 지나가버린다. 하나님이 때를 정하셔서 사람과 자원, 재정을 준비해두셨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결단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쌓여, 10년 전에는 아무 기반이 없던 땅에 교회가 세워지고, 20년 전에 전혀 복음이 들어가 있지 않던 지역에 수많은 예배 공동체가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여러 주에서, 한국의 수많은 젊은 사역자들이 교회를 개척해 온 사례도 이를 증명한다. 처음에는 가정집 한 켠에서 5~6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지만, 10년 후에는 수백 명이 예배하는 공동체로 성장한 이야기가 곳곳에 존재한다.

결국,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말씀이 우리 시대에 다시금 부름이 되려면, 교회는 성령의 지도를 인식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곧 종말론적 시계의 핵심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지키고, 이 길을 식지 않게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선교 사명이 있고, 교회가 그 사명에 부응할 때, 역사는 다시 움직인다. 오늘날의 교회가 식어가는 이유는 불법이 성함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교회가 방어적 태도로 나아가기보다, 다시금 “세상 끝까지” 향해 나아가는 공격적 선교 태도를 취해야만 식어진 열정이 불타오르고, 세상이 교회를 통로로 참된 진리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사도행전 16장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명령과 예수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올리벳담화)을 연결해 보면, 교회가 왜 끊임없이 선교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다원주의와 세속화에 맞서 진리를 붙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임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장재형 목사를 키워드로 살펴보면, 그 역시 이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으며, 실제 교회 개척과 선교 프로젝트를 추진함으로써 ‘성령이 이끄시는 길’을 앞서 실천하려 노력해 왔다. 이러한 신앙 여정은 궁극적으로 올리벳담화가 가리키는 ‘세상 끝날’이 올 때까지 교회가 맡아야 할 본분과 책임이라 말할 수 있다. 교회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비로소 종말이 오며, 그 최종적 완성으로 향해 달려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큰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성도는 “예수 외에 다른 이름이 없다”는 복음의 정수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에 기초한 참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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