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목사(장다윗)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며, 초대 교회와 현대 교회 모두 사랑이 신앙과 공동체의 중심임을 상기시킨다.
사랑의 본질
에베소서 3장을 깊이 들여다보면, 바울이 옥중에서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먼저 눈길을 끈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서 자유를 잃은 상태이지만, 여전히 마음만은 에베소 교회와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을 향해 간절한 사랑과 기도로 가득 차 있다(엡 3:14–15). 실제로 에베소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며,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묶여 해석되곤 한다. 이 편지는 에베소 지역을 넘어 소아시아 여러 교회들에게 순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사정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 바울이 후반부에 드리는 기도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원한다”고 거듭 호소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교리적 해석이나 인간적인 우정을 넘어서는 깊은 영적 실체를 가리킨다.
바울이 사용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그리스어에서 가장 중요한 어휘 중 하나로 꼽히는 “아가페(Agape)”다. 이 아가페는 헬라어의 에로스(Eros), 필로스(Philia)와는 구분되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며 자기헌신적인 사랑”을 가리킨다. 성경의 메시지를 대표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라는 말씀 역시 이 아가페 개념 위에 서 있으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 사랑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강조한다. 이는 사랑이 인간의 의나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립되었음을 보여 주는 핵심 구절이다.
바울이 설립한 여러 교회 중에서도 에베소 교회는 특별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울이 약 3년 동안 이 도시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제자들을 세웠던 기록이 등장한다. 에베소는 당대에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였고, 아르테미스 신전(로마 신화로는 디아나)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도시 전체가 이교적 문화와 신비주의적 요소가 넘쳐났으나, 그곳 한가운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비전을 심어 주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덕분에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 가운데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교회가 계시록 2장에 등장할 때,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게 된 것은 중요한 반전이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외부의 이단 사상과 거짓된 사도들을 용납하지 않으며, 철저히 분별하고 배격해 왔다는 칭찬을 듣는다. 동시에 수고와 인내가 뛰어났다는 점에서도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그 모든 뛰어난 점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이 놓쳐 버린 핵심이 있었다. 바로 ‘처음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불타올랐던 복음에 대한 열정과 희생적 헌신의 마음이다. 교리를 지켜 내는 과정, 치열한 영적 분별과 대적의 싸움 속에서, 그 사랑이 식어 버린 것이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에베소서 3장 14–21절을 설교하면서 이 계시록 2장의 문제의식을 다시 끄집어낸다. “왜 처음 사랑이 그렇게도 중요하며, 그것을 잃어버린 교회는 어떤 길을 가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교회가 초대 교회 시절이나 현대 사회나 똑같이 맞닥뜨리는 ‘위기’ 속에서, 결국 되돌아가야 할 본질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교회가 아무리 성장하고, 바른 교리를 지키고, 많은 프로그램과 사역을 펼쳐도, 그 중심에 ‘사랑’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는 성경의 경고(고전 13:1)를 떠올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한다. 이처럼 사랑은 구원의 핵심이자, 교회 공동체가 붙들어야 할 영적 뿌리이다.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은 바로 그 사랑을 더 깊이 알도록, 깨닫도록, 그리고 결국 ‘살아 내도록’ 간구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심장부”이며, 인류의 근본적 목마름을 채워 주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 18절에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게 하사”라는 구절이 이를 함축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떠한 한계에도 갇히지 않으며, 죄인에게조차 열려 있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전능한 힘이다.
결국 사랑의 본질에 대한 강조는 단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실천으로 이어진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거짓 가르침이 들어올 때, 가장 먼저 식어 버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지적한다. “올바른 분별과 교리 수호가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정죄하고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 율법적 잣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거듭 “사랑”을 외친 것도, 그 사랑이야말로 교회가 생명력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의 길을 갈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환란 중의 소망
바울이 에베소서 3장 13절에서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고 말하는 대목을 주목해 보자. 그는 현재 옥중에서 이 편지를 쓴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그를 따르던 교회들은 지도자가 갇혀 있다는 사실 자체로 크게 낙심하고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에베소 교회 역시 외부의 박해, 내부의 거짓 교사들, 헬라 문화와 이교 숭배가 섞인 도시 환경 속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도 바울은 “낙심하지 말라”고 담대히 선포한다.
여기에는 바울이 터득한 영적 원리가 작동한다. 그는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라고 고백한다. 신앙생활에서 환란과 고난은 결코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고 하셨다. 문제는 환난 자체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 우리가 어떤 태도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3절에서 자신의 환난을 “너희의 영광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역설적인 선언인데, 세상적 눈으로 보면 지도자가 투옥되고, 교회가 박해받는 것은 실패나 치욕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가 된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는 찬송하며 기도하다가 오히려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을 복음으로 인도했다. 고난이 물러나야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통해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에도 교회와 성도들은 여러 형태의 ‘환난’을 경험한다. 물질적 결핍, 병고, 사회적 조롱, 종교적 갈등, 내부 분열 등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설교에서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여러 형태의 고통과 문제들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역시 겉으로 보면 치욕과 비극이었지만, 그 안에 “인류 구원의 완전한 길”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7–18절에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룬다”고 했다. 이는 수학적 계산이나 철학적 논리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 ‘복음의 신비’다. 십자가는 파멸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졌으며, 초대 교회가 박해를 당할수록 복음이 더 멀리 퍼져 나갔고,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다. 낙심이 아니라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이 모든 과정 안에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고난이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니라, 인생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정의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환난 앞에서 낙심하는 대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찾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오히려 거기서 놀라운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환난은 사랑이 식어 갈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동시에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에베소 교회가 실제로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며, 훗날 교회사 속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속사람과 영적 성숙
에베소서 3장 16절에서 바울은 “그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간구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속사람’(inner man) 개념은, 바울 신학에서 매우 독특한 특징을 이룬다. 겉사람(outer man)과 속사람을 구분하는 사상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은 인간이 단순히 육체와 영혼의 이분적 구조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거듭났을 때, 그 영적 존재가 ‘속사람’으로서 본격적으로 살아난다고 본다. 이 속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인도되고, 말씀과 기도로 양육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점차 ‘그분을 닮아 가는’ 과정을 걷는다. 에베소서 전체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표현을 거듭 쓰는데, 이는 속사람이 성장하는 환경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속사람 개념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겉사람은 병들고 늙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속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며 하나님 나라와 연결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인간의 삶은 외형적이고 세상적인 조건들(건강, 재정, 지위 등)이 계속해서 변하고 소멸되어 가지만, 진정한 신앙의 가치는 그 ‘속사람’이 자라고 성숙해지는 데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나 개인 신앙은, 겉사람을 치장하기보다는 속사람을 어떻게 강건하게 세울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방법으로 바울은 “성령의 능력”을 들고, 이어서 기도와 말씀, 사랑의 교제를 실천하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에베소서 4장, 5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 기도에 대해서는 야고보가 ‘낙타 무릎’이라고 불렸던 일화가 전해지듯,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 온 핵심 실천이다. 기도는 인간적 결단이나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게 만든다. 말씀 역시 속사람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 4:4)는 예수의 선언처럼, 신앙인은 말씀을 통해 영의 세계를 인식하고, 진리를 분별하며, 더욱 강건해진다.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과 교제도 빼놓을 수 없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6절에서 교회를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교통하여” 성장하는 유기체로 비유한다. 즉, 개인이 혼자 영적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서로 돕고 권면하며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서 속사람이 더 확실히 자라난다는 뜻이다. 장재형 목사는 “은둔적이고 고립된 영성도 있을 수 있지만, 신약성경이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교회는 함께 기뻐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라고 강조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질그릇(Clay Jar)은 ‘겉사람’을 상징한다. 깨지기 쉽고 약하며, 외적으로는 보잘것없는 그릇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라는 ‘보배’(Treasure)가 담겨 있다. 우리 인생의 겉모습은 자주 후패하거나 약해지지만, 속사람이 강건해지면, 환경이 주는 좌절을 뛰어넘어 계속해서 전진할 수 있다. 에베소 교회가 겉으로는 이단과 갈등, 그리고 도시 문화의 도전으로 흔들릴지라도, 속사람이 강하면 그것을 믿음으로 돌파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바울은 확신에 차서 전달하고 있다.
교회 공동체와 사랑의 실천
에베소 교회는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신약성경 전반에서 여러 차례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사도행전 19장에 따르면, 바울이 이곳에서 제자들을 양육하고, 복음을 강력하게 전파함으로써, 심지어 많은 사람의 생활 양식이 바뀌고, 마술 책이 불태워지는 사건(행 19:19)까지 벌어졌다. 그 정도로 복음이 강력하게 퍼져 나갔던 교회였건만, 계시록 2장에 이르러서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은 사실이 아이러니를 낳는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부터 교회 공동체의 ‘하나 됨’(unity)을 매우 강조한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하며, 은사와 직분이 서로 다르더라도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엡 4:11–13). 교회 안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의 직임이 있더라도, 각 사람이 받은 은사는 결국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를 해설하면서, “교회가 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거나, 외부의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으로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 아니라 차가운 율법적 시스템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가 “거짓 사도들을 시험하여 분별했다”는 칭찬을 받은 것은 본받아야 할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품지 못하고 사랑 없이 정죄하고 배제하기만 했다면, 결국 영적 생명은 식어 갈 수밖에 없다.
교회 공동체에서 사랑이 실천될 때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모습 중 하나가 ‘섬김’과 ‘나눔’이다. 사도행전 2장 44–47절에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서로 소유를 통용하고, 물건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고 기록한다. 고린도후서 8–9장에선, 바울이 여러 지역 교회로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모으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실천은 교회가 단지 내부 결속만 중시하는 집단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을 돌보는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에베소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 그들은 주변 이교 세력과 맞서며 복음을 지키는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서로를 격려하고 세워 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거짓 교사들과의 충돌, 바울의 투옥, 세속 문화의 지속적 유혹 등에 맞서는 과정에서, 사랑이 뒷전으로 밀려나기 쉬운 상황이 되었다. 바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서로 용납하라”, “사랑 가운데서 진리를 말하라”,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고 거듭 권고한다(엡 4장).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다. 내부적으로 교리에 대한 해석이나 사역 방향성에서 의견이 갈릴 수 있고, 교인 간의 갈등이 생길 수 있다. 또한 밖으로는 세상의 세속화와 끊임없는 가치를 놓고 충돌하기도 한다. 이때 사랑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인내하며,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마 5:44)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서로 돌보고, 진정한 연합을 이룰 때,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대한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된다(요 13:34–35).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삶의 완성
에베소서 3장 1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여기서 ‘충만’(plērōma)이라는 낱말은 신약성경, 특히 바울 서신과 요한복음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며, “가득 채움”, “완전함”을 의미한다. 골로새서 2장 9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 ‘신성의 충만’이 깃들어 있다는 점을 선포한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는 그 충만이 교회 공동체에게도 부어져,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엡 1:22–23).
여기에는 ‘신적 역설’이 담겨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빌립보서 2장 6–7절에서처럼 “자기를 비워(kenosis)” 인간의 형상을 취하셨으나, 오히려 그 ‘비움’을 통해 만유의 주가 되셨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을 본받아 자신을 낮추고, 서로를 섬기고, 속사람이 성령으로 날로 새로워진다면, 그 안에 하나님의 충만이 거하게 된다. 즉, 인류가 죄로 인한 결핍과 허무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충만이 그 모든 결핍을 채워 주고, 새로운 정체성과 소명을 부여한다는 의미다.
에베소서 3장 18–19절에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울은 하나님 사랑의 ‘4차원적 크기’를 보여 주고 싶어 한다. 인간적 지식으로는 쉽게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광대하고 심오한 사랑이 곧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실제로 아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체험하고 경험하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엡 3:19)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곧 “우리의 지식 능력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그 사랑을 깨달을 때, 교회와 성도는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삶의 목표가 달라진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세상적 성공이나 외형적 부흥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아직 ‘속사람의 충만함’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 지적한다. 오히려 사랑 안에서 겸손히 서로를 세워 주고, 환난 중에도 서로 격려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올려 드리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는 길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21절에서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라고 찬양한다. 결국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드러나는 이 영광이, 역사의 끝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삶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사랑의 충만’은 단지 교회 부흥이나 윤리적 완성도를 높이려는 게 아니다. 이것은 “인간 창조의 근본 의도와 구원의 계획이 종국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그 목적은 ‘하나님을 반영’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땅에 실현’하는 데 있었다(창 1:27–28). 그러나 죄로 인해 그 목적은 깨지고 왜곡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재창조된 신자들은, 이제 그 ‘사랑’을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금 드러내기 시작한다.
교회는 바로 그 사랑을 통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고 부름받았다(마 5:13–16). 교회가 서로 미워하거나 분쟁만 일으킨다면, 그것은 복음과 모순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충만도 체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 가운데서 행할 때, 환난도 오히려 영광으로 뒤바뀌고, 겉사람의 한계도 속사람의 성장 통로로 사용되며, 공동체는 외부 공격에도 분열되지 않고 오히려 성령 안에서 확장될 수 있다.
바울이 맨 마지막에 드리는 찬송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엡 3:20–21)는, 사실상 에베소서 전반에 흐르는 주제의 절정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분이시며,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보다 더 풍성한 사랑과 은혜로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뿐 아니라, 이를 읽고 있는 모든 성도가 그 믿음 안에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점차적인 영적 완성(온전함)에 이르도록 초청받고 있다.
사랑의 본질이 교회와 신앙의 절대적인 근거임을 재차 확인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은 이 사랑을 어떻게 구체화할까로 방향을 잡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예배 공동체의 목표는 건물이나 프로그램, 재정적 풍요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회복하고, 그것을 외적으로 증거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섬김과 나눔, 회개와 용서, 서로 격려함과 일치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교회됨’을 유지하는 길이다.
이 사랑을 “교리나 도덕적 훈계 이상”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인격적이며, 공동체적이며, 무엇보다도 영적이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감정이나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부어 주시는 힘이다. 그래서 바울은 거듭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외치며,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는 권면을 덧붙인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며(갈 5:22), 그 열매가 열릴 때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한다.
결국 에베소서 3장 14–21절의 두 번째 기도는 바울이 단지 “하나님, 나를 감옥에서 꺼내 주소서”라고 구하거나, “에베소 교회가 세상적으로 강해지게 해 달라”고 청하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너희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라”는 영적이며 본질적인 기도다. 이 기도는 21세기를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회의 위상이 흔들리고, 세상은 교회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성도들마저 낙심하기 쉬운 상황에서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속사람의 강건함’과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제까지 정리한 다섯 가지 주제——사랑의 본질, 환란 중의 소망, 속사람과 영적 성숙, 교회 공동체와 사랑의 실천,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삶의 완성——은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면, 환란을 통과할 수 있는 소망이 생기고, 그 소망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속사람은 더 강건해진다. 속사람이 자라나면, 자연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실천이 활발해지고, 그 결과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공동체와 개인에게 부어져, 삶 전체가 변화되고 완성의 길을 향해 나아간다.
바울이 바라는 최종적 지향점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엡 3:21) 바라는 것이다. 이 영광은 교회가 세상에서 얻는 명성이나, 세속적 성공 지표로 측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교회’와 ‘보이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으며, 겉사람의 후패에 구애받지 않고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모습을 볼 때, 세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마 5:16).
따라서 이 기도는 시대를 초월해 모든 신앙인에게 유효한 메시지를 전한다. 현대 사회가 교회를 향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을지라도, 교회가 진정한 사랑을 회복한다면, 그 어떤 반대나 조롱도 오히려 복음의 문을 더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교회가 점점 편의적 제도나 외적 성장만 의지한다면, 처음 사랑을 버렸던 에베소 교회처럼, 과거의 영광만 붙들고 실제론 생명력을 잃을 위험이 있다.
장재형(장다윗) 목사의 설교는 이런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에베소서 3장의 핵심 주제——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시급하고도 중대한 것인지 보여 준다. 그는 “교회의 위상은 결국 얼마나 사랑이 회복되고 실천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한때 에베소 교회가 수고와 인내로 칭찬을 받았어도, 사랑을 잃었을 때는 그 사역이 무의미해지고, 공동체가 쇠락하는 길에 들어섰음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반대로, 사랑을 되찾고 복음을 다시 삶으로 살아낼 때, 교회는 역사의 어떤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다.
나아가 사랑은 이 땅에서의 윤리적·공동체적 책임을 수행하도록 이끈다. 사랑이 교회 내부의 유대만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세상 속으로 흘러가야 ‘참 교회성’이 드러난다. 에베소 교회가 주변 문화를 어떻게 섬겼는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진 않았으나, 적어도 바울이 지향한 복음관은 “복음을 들은 자들은 세상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고후 2:15). 예수께서도 마 25장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셨다. 교회가 사랑을 잃을 때, 외형적 성장과 프로그램은 있을지 모르나, 정작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은 퇴색된다.
결국 이 모든 논의의 결론은 에베소서 3장 14–21절을 향해 모인다. 바울의 간절한 기도, “너희가 사랑을 깨달아 그 충만에 이르기를”이라는 기도는 단순한 덕담이나 축복이 아니라, 신약신학의 정수(精髓)를 담은 간구다. 교회가 이 사랑을 붙들고 계속해서 성장해 간다면, 시대가 달라져도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장되고, 복음의 능력은 바울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설교 말미에 “우리는 인생에서 사랑보다 더 큰 목적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본성이 곧 사랑이며(요일 4:8), 그리스도의 구속이 사랑에 기초했으며, 교회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도 사랑이라는 사실은, 바울 서신 전반과 신약 전체가 합창하듯 노래하는 주제다. 그 사랑이 회복될 때, 비로소 환난 가운데도 소망을 가지고, 속사람이 부활의 생명력으로 새로워지며, 교회 공동체가 분열이 아닌 연합과 협력,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게 된다. 마침내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교회와 성도에게 부어져, 우리의 삶과 역사를 온전히 변혁하는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다.
맺어 보면, 에베소서 3장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본질, 환란 중의 소망, 속사람의 강건함과 영적 성숙,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 실천,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러 삶이 완성되는 과정은 모두 하나의 거대한 신학적·영적 서사로 이어진다. 바울은 옥중에서 이 기도를 하면서, 에베소 교회와 그 이후의 모든 세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깊이 뿌리내리기를 원했다. 장재형(장다윗) 목사의 설교 역시 이런 성경적 전망을 중심에 두고, 우리가 당장 살아가는 시대적 도전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사랑을 붙드는 길’을 택하도록 독려한다.
환난이 클수록 사랑이 빛난다. 겉사람이 약해질수록 속사람이 더 강건해질 기회가 된다. 교리와 분별이 필요할수록 교회는 사랑으로 서로 품고 협력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한 바울의 열망에 화답하는 길이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 역시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참된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될 때, 결국 우리의 연약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보배가 온전히 드러나고, 그 사랑의 능력이 세상 한가운데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복음이 계속해서 전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