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유혹과 영적 전쟁 – 장재형목사

Ⅰ.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그리고 3장에 드러나는 인간의 타락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이야기가 모든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임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창 1:1의 말씀은 우주 만물의 기원과 존재의 이유, 나아가 인간의 근본적 목적과 운명을 통찰하는 기초가 된다고 한다. 이 창조의 드라마에서 하나님은 혼돈 속에 빛을 선포하시고, 그 빛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구분되면서 하늘(Heavens)과 땅(Earth)이 질서 있게 형성되었다. 창조의 모든 장면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영하기에, 맨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나온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이 가진 존귀한 정체성(하나님의 형상)과 특별한 사명(만물을 다스리며 창조 세계를 아름답게 돌보는 역할)을 설파한다. 동시에 창세기 1장과 2장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누릴 수 있었던 완벽한 상태를 펼쳐 보여주는데,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시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는 금령을 주심으로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책임을 동시에 부여하셨다고 해석한다. 곧,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리모트 콘트롤하려 하지 않으셨다.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셨기에, 스스로 말씀을 지키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설계하셨다”라고 말한다. 문제는 그 인간이 하늘의 뜻에 따라 자유를 바르게 행사하기보다 타락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이 그 전환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장 1절에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먼저, 그에 따르면 뱀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점이 아주 분명히 선언되어 있다. 이는 이원론적 시각—태초부터 선한 신(하나님)과 악한 신(사탄)이 나란히 존재했다는—이 성경적으로는 틀렸음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악의 원천이 하나님과 대등한 어떤 악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 중에서 타락해버린 사탄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곧, 뱀은 본래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이었으나, 간교한 지혜를 활용해 반역함으로 사탄이 되었고,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창세기 3장 속 뱀의 모습이 단지 사람이 아는 그 생물학적 뱀이 아니라, 예언서와 신약성경에서 ‘마귀’ 혹은 ‘사탄’이라 칭해지는 영적 존재를 상징한다고 본다. 그래서 “큰 용 곧 옛 뱀 사탄 마귀”라고 계시록 12장 9절에서 선언되는 대목이 창세기 3장의 뱀과 일치한다고 가르친다.

이어 그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질서에 반역한 사탄이 어떻게 내쫓겼는지 계시록 12장을 통해 설명한다. 사탄은 머리에 일곱 왕관을 쓴 큰 붉은 용으로 묘사되며, 그 꼬리로 하늘 별들의 삼분의 일을 끌어내릴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 ‘큰 용’은 결국 하늘에서 추방되어 땅으로 내어쫓겼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고, 그때 함께 쫓겨난 자들이 이 세상 통치자들(Rulers)과 권세자들(Powers) 위에 포진하여 세상 풍조를 물들이고, 사람들을 눈멀게 하며 혼미케 한다고 에베소서 6장을 근거로 설명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영적 배후 세력의 존재가 성경적 세계관의 중요한 열쇠라 한다. 인간이 여러 악을 행하는 진짜 이유는 단순히 육체적 본성이나 환경에 있지 않고, 근원적으로 사탄에게 미혹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책임이 사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통해, 즉 ‘네 탓이요,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요’라는 고백으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점도 동시에 강조한다. “하나님이 뱀을 만드셨는데 왜 이런 타락이 일어났느냐”고 질문할 때, 바로 이 자유의지를 가진 영적 존재가 반역했다는 답을 제시하며,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의 간계이지만, 그 사탄의 유혹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우리의 몫”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그는 야고보서 1장 13절의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을 들어, 신앙인이라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떠넘기는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수많은 고통과 시험 뒤에는 간교한 뱀, 즉 사탄이 은밀히 작동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동시에 인간 자신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음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의 죄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려고 “우리가 결국 더 큰 은혜를 누리도록 타락을 허용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렇게 말하면 모든 책임을 피조물(인간)에서 창조주(하나님)에게 전가하는 결과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 “선악과 금령”을 주신 하나님은 전혀 악하지 않으시며, 인간과 함께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셨으나,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자발적으로 굴복함으로 죄가 들어왔다는 해석이 타당하다고 그는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이 선하게 만드신 그 천사적 존재가 타락하여 사탄, 마귀, 뱀, 용이 되었다는 점을 여러 본문으로 확증한다. 그는 이 점이 구원론의 핵심과도 연결된다고 본다. 곧, 인간은 본디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살았으나 사탄에게 미혹되었고, 그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사망이 왔다. 창세기 3장 이후 온 우주는 이 타락의 영향 아래 신음하고 있으며(롬8:22 참조),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이 선포된다는 메시지가 성경 전체를 관통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창세기 3장의 뱀 사건은 단순히 ‘옛날에 벌어진 그때 거기(there then)의 비극’이 아니라, ‘지금 여기(here now) 우리에게 매일 일어나는 실제적이고도 생생한 유혹’임을 체감하는 계기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예수가 누구인지, 또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나와 맞서 싸우는 사탄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그가 종종 예화로 드는 것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 안에 깃든 어둠의 영이 쑥 빠져나가는 순간을 목격하는 일화이다. 장재형목사는 대학가에서 성경을 가르치다가, 마지못해 끌려온 어느 학생에게 말씀이 선포될 때 그 사람 안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나가는 것을 영적으로 감지한 적이 있다고 간증한다. “내가 선포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세가 말씀과 함께 전해질 때 사탄이 더는 그 영혼을 붙들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사탄은 인간의 지정의를 타락시키고,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다양한 ‘간교한 지혜’를 동원한다. 그러나 그 배후를 알아보면 “사탄의 실체는 그리 거창하지 않으며, 예수의 이름에 벌벌 떠는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계시록 12장 9절의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라는 말씀을 특별히 강조하며, 신자들은 이미 이긴 전쟁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고 담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담대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바울이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명령하신 대로 신앙의 무장을 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말씀),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로 깨어 있지 않으면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왜 하와가 먼저 사탄의 유혹을 받았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본문(창세기 2장과 3장)을 깊이 살펴보면 아담이 하나님께 직접 금령을 받았고, 하와는 아담을 통해 전해 들은 2차적 지식이었다고 해석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성경의 서술 순서상의 논리적 접근이지만, 그는“말씀을 직접 받고 깊이 깨달은 자가 그렇지 못한 자보다 더 유혹에 강할 수 있다. 하와가 연약했다는 것은 단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깊은 ‘체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 따라서 현대 신앙인도 직접적으로 성경을 듣고, 읽고, 깊이 깨닫고, 그것을 삶에서 반복 적용하며 영적 전쟁의 무장을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결론은, 뱀의 간교함이든 인간의 연약함이든, 이 모든 것을 내어쫓고 이길 수 있는 열쇠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있다. 사탄은 인간을 파멸로 끌고 가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들의 권세(요1:12)를 누릴 수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주어지는 약속이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는 원시복음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마귀가 노리는 것은 신자들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따라서 그는 이 거룩한 전투의 최종 승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그 승리에 동참할 것을 힘 있게 선포하며, 성도들에게 “내 탓이요”의 회개와 “예수의 권세와 능력”을 지님으로 사탄에게 결박당하지 말라고 강권한다.

Ⅱ. 주기도문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가 지닌 의미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과정을 설교할 때, 주기도문의 한 구절과 깊이 연결지어 본다. 즉,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이, 곧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사탄의 전략과 그 대응책을 직접적으로 다룬 핵심 기도라는 것이다. 그는 이 기도문에 담긴 구조를 여러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가장 심플하게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하는 전반부, 그리고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죄 용서, 시험에서 구해 달라는 간구가 이어지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그중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인간이 뱀의 간교함에 무너졌던 창세기 3장과 바로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험이 우리를 찾아올 때, 우리는 쉽게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말하듯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신다. 사탄이 역사하는 것이고, 우리의 욕심이 잉태되어 죄를 낳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주기도문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는, 신자라 할지라도 스스로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제발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사탄의 발판이 되지 않도록, 내 마음을 지켜주소서”라고 부르짖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전략적 기도”라 부른다. 사탄이 모든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역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우리는 기도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도의 내용이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에 집약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요청이, 그저 ‘악행을 저지르지 않게 해 달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악한 자 사탄으로부터 나를 구출해 달라’는 영적 전쟁의 호소임을 역설한다. “인간은 홀로 서 있을 때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면 사탄이 항복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의 광인 안에 들어있던 군대 귀신의 요청을 들으셨을 때,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사정하는 마귀들의 비참하고도 굴욕적인 모습이 사탄의 실체다”라고 그는 말한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는 결국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의 보혈과 권세 안에 나를 두셔서, 사탄이 마음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달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해석된다고 장재형목사는 가르친다.

그는 교회 안에서도 이 주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외우는 수준에서 머무르지 말고, 실제 영적전쟁의 언어로 읽고 적용하라고 권면한다. 설교 중에는 “주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를 할 때, ‘시험’과 ‘악’이 결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 “정말 하나님이 너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라며 교묘히 질문을 던지듯, 우리 일상에서도 마귀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들거나, 스스로 ‘내 중심적 판단’을 하게끔 부추긴다. 결국 “하나님은 이거 하지 말라셨지? 그런데 그분이 정말 너를 위한 거야, 아니면 뭔가 숨긴 게 있어?”라고 속삭이면서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전략’을 펼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이 가장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타락의 문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는 데서 열린다.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 거기서 죄가 잉태된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하와의 대답이다. 하와는 뱀의 질문에, “우리는 동산의 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라고 응수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까지 주셨는지에 대해 창세기 2장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 점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하와가 말씀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데서 오는 문제, 혹은 그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이미 생긴 불신이 가중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한 예를 들어, 사람이 말씀을 부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사탄이 그 틈새를 노리고 자신만의 거짓말을 슬쩍 끼워넣어 혼란케 하거나 하나님을 더욱 왜곡된 분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쉽다는 사실을 경고한다. 주기도문을 붙들고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생각, 자기 해석을 절대화하다가 스스로를 죄의 함정에 빠뜨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주기도문이라는 거대한 방패막을 통해, 매일매일 영적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에 삼키우지 않도록 늘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설파한다. 그것이 사탄의 간계를 꿰뚫고 승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야고보서 1장 2절 이하도 함께 인용하며,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이‘사탄의 시험’을 하나님이 쓰셔서 결국 우리를 단련하신다는 차원의 선한 열매를 언급하지만, 그럼에도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전제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사탄은 그 연약함을 공격해온다는 사실이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이 그래서 절실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의지력이나 도덕성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겨보겠다고 나서면 반드시 실패한다. 오직 예수 안에서의 기도가 열쇠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승리를 기억하며, 우리가 그 완성된 승리를 내 것으로 붙들기 원한다고 날마다 간구해야 한다”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리고 이 기도가 단지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교회와 공동체, 더 나아가 국가와 지도자를 위해서도 드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탄은 통치자나 권세자에게 달라붙어 더 큰 악을 만들어내기 쉽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6장 12절이 말하듯,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 우리의 씨름이라고 할 때, 주기도문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는 현시대 정치와 문화, 사회와 경제 전반에 드리운 영적 어둠에 대한 기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이 부분을 통해, 예수의 권세로 사탄이 결박되어야 하는 영역이 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도 넓게 존재함을 밝히며, 신자는 각자의 삶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Ⅲ. 영적전쟁과 하나님의 사랑

장재형목사는 결론적으로 창세기 1~2장을 통해 본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 그리고 3장에 드러나는 인간의 타락 과정을 ‘영적전쟁의 실제적 서막’으로 규정한다. 에덴동산이라는 완벽한 조건에서 첫사람이 사탄의 유혹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우리 또한 얼마든지 죄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임을 경고해 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이것이 단순히 절망적 메시지로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이미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복음을 예언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예표이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근본적으로 박살 내심으로써, 인간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그가 “영적전쟁”을 말할 때, 흔히 들려오는 극단적 신비주의나 미신적 접근과는 다른 “말씀 중심의 전쟁”을 강조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는 종종 “경건의 모양만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태도를 반대하며, 동시에 “영적전쟁을 내세워 검증되지 않은 신비 체험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상 위주로 몰아가는 풍조”도 경계한다고 말한다. 대신 성경이 말하는 영적전쟁은, “뱀의 머리를 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만연한 마귀의 거짓말을 몰아내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구체적으로는, 말씀이 선포될 때 악한 영이 물러가고, 회개와 죄사함이 선포될 때 사탄의 고소가 힘을 잃으며, 예배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어둠이 떠나가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게 영적전쟁이라고 설파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아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사랑이 식으면 믿음이 식고, 믿음이 식으면 사탄이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이 커지기에, 인간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았음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주 요한복음 1장 12절을 인용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원래 인간에게 허락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사탄에게 빼앗긴 상태였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현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아담이 잃어버린 자리, 하나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로서의 존엄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영적전쟁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이미 내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이 지식이 없으면, 사람들은 여전히 사탄에게 끌려다니며 어둠 속에서 밤낮 불안해하고 갈급해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선포하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에 결국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핵심 가르침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밤에 잠이 오지 않고 괴롭다면, 어둠의 영이 그대를 괴롭히고 있는지 성찰해 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밤은 곧 대낮이 될 수 있다”라고 한다. 빛 되신 예수께서 함께하시면 사탄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체험한 수많은 치유와 회복의 역사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 간증한다. 가령, 귀가 들리지 않던 누군가가 성령의 임재 가운데 ‘어둠의 영’이 떠나고 귀가 뚫리는 역사를 경험했다는 일화도 예로 든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자랑하듯 말하기보다,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말씀의 권세”라는 점을 강조한다. 초대교회가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았던 것처럼, 지금도 믿는 자에게 동일한 능력이 임하며 그것이 바로 영적전쟁에서의 성도의 무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남용해선 안 된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그럼 우리는 아무 고난도 없어야 하고, 언제나 즉각적 기적으로 문제를 해결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탄이 공격해오고, 이 땅에 죄의 흔적과 상처가 가득한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소망 중에 인내’할 수 있는 이유가 예수의 승리가 우리와 함께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의 “피조물도 고대하는 바가 있으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 피조물 전체가 함께 탄식하며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구절을 들어, 창조 세계가 여전히 죄의 영향 아래 신음하지만, 동시에 구원 완성의 소망을 버리지 않는 이중적 상태에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새로워지고, 사탄은 완전히 무저갱에 던져져 끝없이 결박될 것이며,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송할 것이라는 희망이 그가 전하는 궁극적 종말론이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부터 시작하여, 마귀와 사탄으로 일컬어지는 영적 실체가 어떻게 인간을 속이고 넘어뜨리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주기도문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설교한다. 그의 설교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사상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도, 성령의 능력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내 탓이요”를 외치며 회개하고, 예수를 진정으로 영접하면, “영적전쟁의 승리는 이미 확정된 사실”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진리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자유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원한 안식과 기쁨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의 말미마다, 성도들이 단지 지적 동의나 호기심 충족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 삶 속에서 사탄의 대가리를 치는 ‘실제적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고 촉구한다. 예컨대 집이나 생활공간에서 십자가를 세우고, 봉헌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의 권세를 선포하는 것, 가정예배를 드리며 영적 질서를 세우는 것, 말씀을 매일 묵상함으로 어둠이 틈타지 못하도록 하는 것 등이 구체적 방법으로 제시된다. 그는 “마귀들이 예수께 애원하듯, 결국은 예수 이름 앞에서 쫓겨나는 것이 사탄의 숙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짝하여 살면, 사탄은 계속 우리 안에 머문다. 그러므로 영적전쟁은 실제적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결국 그의 설교 전반의 흐름은 “인간의 타락, 죄의 책임, 사탄의 간교함, 예수의 승리, 그리고 신자의 영적전쟁”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보고 있다. 창세기 3장의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사건이야말로 구약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거대한 내러티브, 곧 ‘하나님 나라 vs. 사탄의 왕국’의 충돌에서 중요한 모멘트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이 거룩한 전투에 임하는 신자의 핵심 무기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이 기도를 매일매일 드릴 때, 사탄은 우리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고 달려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 머리를 박살 낼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곧, “피조물인 사탄이 결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으며, 이미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패배가 확정된 존재”라는 신학적 확신 위에 세워진다. 동시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자”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장재형목사가 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바라주는 궁극적 메시지는 그래서 “인간의 타락이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사탄이란 언제든 우리를 밀어뜨릴 수 있는 영적 원수라는 사실을 직면하자. 그러나 두려워 말고, 예수 이름으로 담대히 대적하라. 이미 예수께서 승리하셨기에 우리도 그 승리를 누릴 수 있다.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기도하고, 마음을 지키며, ‘내 탓이요’라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과 회복을 허락하신다”라는 요약으로 귀결된다. 그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머물 때, “사탄의 시험을 당해도 견디며, 오히려 영적으로 더욱 강건해지고, 예수의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는 신앙적 도약을 약속한다.

장재형목사가 창세기 3장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설교는, 사랑의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관계, 그리고 사탄의 기원과 활동을 면밀히 다루면서,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지는 구원의 역사와 영적전쟁의 의미를 매우 실감나게 제시한다. 그가 강조하는 점은 언제나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동시에 예수 안에서 부름받아 구원받은 자이니, 사탄에 맞서 싸울 영적 무장을 갖추고 매일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이 결코 우리 힘이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1~2장의 창조와 3장의 타락, 그리고 주기도문과 야고보서·계시록 등 신구약 전반의 말씀을 종합하여, 교회가 이 땅에서 맞서야 할 진정한 적이 “공중권세를 잡은 악의 영들”임을 밝혀주며, 동시에 신자들에게“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것이니 담대하라”고 권면한다. 이 권면 속에서, 그는 결코 무모한 전쟁론이나 막연한 두려움으로 몰아가지 않으며, 오히려 “말씀과 기도로 무장된 자에게는 어둠이 틈탈 자리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 선언 뒤에는 늘 “내가 누군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예수의 권세를 유업으로 물려받았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라는 확신이 자리해 있으며, 그것이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복음의 정수이자 영적전쟁의 실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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