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 장재형목사

1. 빌라도의 관정에 서신 예수님 – 고난의 배경과 인간의 악함

사순절 기간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해한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까지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시는 장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긴 심문과 대화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가진 악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기자는 이 과정을 매우 길고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예수님이 단순히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함만 받은 것이 아니라, 당대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로마의 법정에까지 넘겨져 참혹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읽으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극심한 고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쉽게 위선적 가면을 쓰고 진정한 경건을 잃어버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결국 어느 정도까지 치달을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 또한 이 본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종교적 형식주의와 인간의 간교한 위선이 결국 참된 진리를 가린다는 점을 여러 차례 지적해 왔습니다.

본문은 새벽녘, 예수님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가야바의 법정을 거쳐 빌라도가 있는 관정으로 끌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요 18:28). 어두운 밤이 지나 새벽이 밝아오지만, 예수님께는 결박과 모욕이 끝나지 않은 채로 또 다른 심판의 자리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미 안나스에게서 가야바의 집으로, 그리고 다시 관정으로 끌려오시는 동안 주님은 온갖 모욕과 폭력에 시달리셨을 것입니다. 그 길은 매우 길었고, 대부분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외로움과 고독을 놓치지 않고 기록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그 길에 함께해야 했겠지만,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주님이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순간에 홀로 두지는 않았는지, 우리도 모르게 주님과 다른 길을 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혹은 개인의 신앙생활 안에서, 주님과의 동행이 아닌 독선적 길을 걷고 있지 않은지 늘 경계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고독의 길에 계신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동행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여러 설교와 저술에서 던져 왔습니다. 고난주간이나 사순절기에만 잠시 생각하는 문제가 아니라, 일상의 순간마다 주님께서 겪으신 고독과 고난을 함께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대조는,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유월절 잔치를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관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 18:28). 이것은 매우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태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고 백성을 이끌어야 할 책임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 안에 예수님에 대한 증오와 살인의 마음을 가득 품고 있으면서도,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면 부정해진다’는 이유로 관정에 발을 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유월절이라는 큰 절기를 거룩하게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태도 자체는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문제는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증오와 음모로 죽이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들의 외적인 경건과 종교적 의식은 지키면서,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죄악을 범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유월절 어린 양이시며(고전 5:7), 그분의 살과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는데, 그들은 그 예수님을 이방 권력자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이는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적 사건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들의 악을 정당화하려는 극단적인 이중성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종교적 위선을 두고, 현대 교회와 신자들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자주 언급합니다. “우리도 외적인 의무와 형식만으로 신앙생활을 삼지는 않는가? 겉으로는 거룩한 예배, 깨끗한 의례, 흠없는 절기를 지키면서도, 정작 내면의 죄와 이중성에 대해서는 외면하지 않는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요 18:29 이하)에서 빌라도는 밖으로 나가 유대인들에게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라고 묻습니다. 빌라도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넘어온 죄수가 정말 로마법에 저촉되는 죄를 범했는지 알아야 했기에, 일단 죄목을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8:30)라고 답하는데, 이는 예수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로마법 위반 사항이 있었다고 증명하기보다 “이미 악한 자이니 맡아 달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말에 불과합니다. 빌라도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하자, 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요 18:31)라고 응수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고, 반드시 죽이기 위해 로마의 사형제도인 십자가형을 얻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대목은 참으로 섬뜩하고 비극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종교적 거룩을 내세우는 자들이, 실은 마음 깊은 곳에 예수님을 향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고, ‘죽이는 권한’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자기들이 직접 돌로 쳐 죽일 수도 있었으나(스데반의 사례에서 보듯), 그들은 더 가혹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형으로 예수님을 내몰려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가해진 증오는, 단순히 오해나 충돌을 넘어, 극단적인 폭력과 악의 결정체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32절에서 요한은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이방인의 법정, 즉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심으로써, 구약의 예언과 예수님의 직접적인 예고대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인자가 땅에서 들려야 한다”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고(요3:14, 12:32), 그 ‘들림’은 곧 ‘십자가 위로 들어 올려지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빌라도에게 넘겨지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참혹하고 치욕적인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에 처해지셨고, 이는 유대인들의 교활한 계산과 로마의 잔혹한 사형제도가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해석하며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극악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지만, 동시에 그 십자가가 가장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자리로 역전된다”는 역설을 늘 설교에서 강조해 왔습니다. 인간의 죄가 한없이 깊고 무겁게 펼쳐질수록,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나 인간의 음모로만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극단적 악함조차 당신의 구원 계획을 펼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구약의 요셉 이야기에서처럼(창 50:20), 형들의 악한 의도가 결과적으로는 생명을 살리는 큰 그림 속에서 쓰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도 하나님께서 이미 예정하신 대속의 길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당연히 인간의 악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선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신뢰해야 함을 배웁니다. 빌라도의 심문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동시에 ‘예수님께 과연 죄가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맞닥뜨립니다. 결론은 언제나 “죄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 ‘어떤 방식으로든 죄목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잔인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을 예수님이 받으셨다는 사실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요 18:34)라고 되물으십니다. 이는 ‘정말 너 스스로 알고 싶은 진실인가, 아니면 남이 한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 역시 이 질문에 뚜렷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오히려“내가 유대인이냐”라고 응수합니다(요 18:35). 빌라도로서는 유대 종교의 내부 문제, 즉 메시아 논쟁에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로마법을 위반한 반역자나 폭도인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묻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관심이 없는데, 네가 어떤 죄를 지었길래 이들이 너를 이렇게까지 증오하느냐?”는 의아함이 깔려 있는 질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 66-68). 그리고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답하시어, 사실상 메시야적 권위를 선언하셨습니다. 즉, 문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진실을 듣고 믿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결정해 놓고, 그를 유죄로 만들 구실만 찾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듣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아니라,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자신의 논리만 뒷받침해 줄 증거를 찾는 태도라면, 아무리 확실한 진실이 제시되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경직된 죄성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구절을 해석하며,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이미 선입견과 교만한 태도로 가득 차 있다면, 결코 참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결국 빌라도처럼, 대제사장들처럼,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는 데 급급할 뿐 진리를 놓치고 만다”고 말하곤 합니다.

빌라도 역시 진리를 찾으려 했다기보다는, 정치적 타협을 통해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관례를 이용해 예수님을 석방하려 했고,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 18:38)라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친척이 아니니다”라는 압박을 가해 빌라도를 궁지로 몰았습니다(요 19:12 참조). 결국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 안에 있는 두려움과 세상 권세에 대한 집착을 봅니다. 그는 선을 행할 결심을 잠시 품었으나, 그 결심을 정치적 압박 앞에 포기해 버렸습니다. 인간은 권력과 이익의 문제 앞에서 종종 진리를 저버립니다. 외적인 명분과 정의를 말해도, 실질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할 상황이 닥치면 곧바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불의한 결정을 내리곤 합니다. 빌라도는 ‘나는 결백하다’고 손을 씻었으나(마27:24), 결코 결백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분별하고도 행하지 않은 죄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 사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인간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종교적 열심을 포장 삼아 폭력과 살인을 정당화하려 드는 위선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외적인 거룩, 절기,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고, 심지어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으니 로마가 대신 사형을 집행해 달라”고 말하면서 자기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 했습니다. 겉보기에 종교적으로 ‘깨끗한 절기’를 지키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선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빌라도처럼 진리에 대해 형식적인 관심만 두면서, 결국 자신의 정치적 안전과 권력을 우선시하는 모습입니다. 대제사장들이 악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면, 빌라도는 악의까지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외면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죄의 형태가 다를 뿐, 뿌리는 인간이 가진 죄성이라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와 세속 권력자의 죄, 그 사이에서 언제나 빛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외면당하고 고통받으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고통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고난이었다”고 요약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고, 혹시 빌라도처럼 진리 앞에 머뭇거리며 현실과 타협하고, 대제사장들처럼 거룩이라는 명분으로 잔인한 판단을 하지는 않는지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2.진리의 왕이신 예수님과 우리의 신앙적 응답

본문의 흐름을 계속 따라가 보면,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결국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요 18:37~38).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전에“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묻기 전부터 ‘진리가 자신이며, 그 진리에 속한 자들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의 큰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요 14:6), 진리는 인격적 차원에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진리’라는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거나 무의미하게 여겨졌을지 모릅니다. 그는 정치적ㆍ행정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총독이었을 뿐, 철학자나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은, 참답게 진리를 찾으려는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상대방(예수님)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이 과연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일종의 냉소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진리는 결코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진리는 예수님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그분이 가르치시고 행하신 모든 사역에서 드러납니다. 곧, 진리는 사랑이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희생으로 구체화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으로 곧바로 답을 내리시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유대 종교권력과 로마 정치권력의 야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볼 때는 실패이자 수치요 패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 분명한 승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셨고, 동시에 모든 민족과 세상의 왕이십니다. 하지만 그 왕위에 오르시는 방식은 세상의 권세자들이 추구하는 폭력과 억압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나의 왕국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로마와 유대 지도자들이 계산하는 “권력과 패권”의 방식으로 통치하시는 분이 아님을 뜻합니다.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 이후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새 생명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한 신앙적 응답을 어떻게 보여야 할까요? 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을 토대로, “듣고 순종하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진리는 머리로만 동의하는 관념이 아니라, 우리의 전 인격을 사로잡아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이냐?”를 냉소적으로 던지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 속에서 오직 손익 계산으로만 반응할 수 있습니다. 혹은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처럼, 종교적 열심과 형식은 있지만 실상은 자기 유익을 추구하거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왕이시며 참 진리이십니다. 그분과 연합하는 자는, 이 땅의 잠시 있다 사라질 권력과 쾌락의 유혹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는 생명의 길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서 선고를 받으신 후에, 십자가형을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조롱을 받으셨고,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며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요 19:2~3). 하지만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진정한 왕의 위엄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세속 권세는 무력으로, 재물로, 배타적 폭력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폭력과 죄의 짐을 기꺼이 지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서가 반복해서 증언하는 바,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다가가셨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세상에서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군림하여 예배받는 곳이 아니라,사랑으로 섬기고 거룩함과 정의로 다스리는 곳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와 저술에서 “그리스도의 왕직은 고난과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자주 강조합니다. 왕이신 예수님이 가장 낮은 자리가 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하나님 나라’가 갖는 독특한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끄러움과 실패로 가득 차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 길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완성되는 자리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6절을 통해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아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장면으로 본문은 이어지는데, 그 길에서 주님은 또다시 얼마나 많은 조롱과 고통을 감당하셔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진 고통을 다 겪으시며 이루신 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을 영원히 이기신 왕이 되셨습니다. 이는 구약 시편과 선지서들이 예언했던 ‘의로운 왕’의 실현이며, 동시에 우리가 영화롭게 바라볼 승리의 모습입니다. 그 승리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무력이나 군대 혹은 권세가 아니라, 섬김과 자비, 그리고 자기희생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도전을 주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종교적 형식주의와 내면적 위선 사이의 간극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보여준 모습을 보면,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고자 관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는 모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는 과연 어떤 종교적 의무와 예식을 열심히 지키면서도, 정작 참 사랑과 공의의 실천에는 무감각한 것은 아닌가?”라고 자문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겉으로는 모든 의식을 올바로 지키는 것 같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을 매일 배반하고 있는가?”라는 자기 성찰을 강조합니다. 교회 생활이 오래되고, 봉사나 예배 참여가 익숙해질수록 형식만 남고, 열정과 진실함이 사라지는 위험이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둘째, 진리에 속한 자로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빌라도의 물음 “진리가 무엇이냐?”에 예수님은 답변을 회피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전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참된 왕이심을 드러내셨고,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빌라도가 이 말씀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하고 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결국 진리를 분명하게 인식했음에도 외면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세상의 일과 명예, 생활의 편의성, 혹은 두려움 때문에 진리와 타협하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때론 진리 때문에 희생이 따를 수도 있고, 갈등이 있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명예나 재산을 잃을 수 있다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진리에 속한 자”라면 기꺼이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 용서, 섬김의 길이며, 자기 부인을 통해 얻게 되는 부활의 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진리 순종의 길에 대해 “십자가가 우리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깨뜨려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기 위함”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셋째,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처절한 수난은 그분의 철저한 순종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이었고, 실제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잔혹함을 동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넘겨지시는 동안에도, 침묵을 지키시고 자신의 죄없음을 시종일관 고소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기보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 18:11)라는 자세로 일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보이신 순종은 신자가 본받아야 할 신앙생활의 본질이 됩니다. 우리는 삶의 여러 영역에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손해가 따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의 조롱이나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부활의 영광을 누리셨듯, 우리도 종국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고, 결과적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어린 양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구속 사건이 되었습니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유월절의 역사적 배경에서,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의 사자를 넘어가게 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출 12:13). 그렇게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월절 어린 양의 예표를 완전히 성취하신 분이며, 그분의 피로 우리에게 영적 해방이 주어졌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이 이제 십자가 사건을 통해 확실하게 입증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에 참여함으로써(요 6:53~57), 생명을 얻고 영원한 언약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와 절기는 단지 형태와 의식을 갖추는 데 그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연합, 그분의 보혈을 통한 새로운 삶의 체험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만일 대제사장들과 같이 외적인 거룩함만 좇으면서 실제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신앙의 본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유월절의 완성은 십자가, 그리고 부활에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과 자유를 누리는 길은 철저히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는 데 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결국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에 이르는 긴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과정에서 드러난 인간의 간교함과 잔혹함,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정치적 계산과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외면했고, 유대 지도자들은 종교적 열심과 위선으로 참 생명의 길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거룩한 희생을 가로막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치욕스럽고 참혹한 처형법인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놓고서도 답변을 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 자체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출발이자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우리 죄가 어떤 심판을 받을 만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까지 보장하는 신령한 길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을 향한 찬양과 순종의 마음을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이 진리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혹시 빌라도처럼 당장의 정치적ㆍ사회적 현실 문제 때문에, 혹은 종교 지도자들처럼 외적 거룩에만 갇혀서, 참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말입니다. 진정한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한다면, 우리의 삶도 날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부활 신앙이 바로 교회 공동체의 근간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힘이 된다고 설파합니다. 교회의 사역이 형식적 종교 행사나 조직 운영에만 치중되지 않고, 사랑과 정의, 용서와 화해의 길을 활짝 여는 것은 결국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관정에 서셨다는 것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진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그 고난에 어떻게 동참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영원한 질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죄악되고 간교하다 해도,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통해 그 죄의 본질을 드러내고 해결하십니다.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들이 협잡과 위선으로 일관해도, 결국 예수님을 가로막지 못한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사로잡힐 때 모든 죄와 거짓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이 은혜의 길에 자신을 내어 맡긴 사람은, 더는 빌라도처럼 진리를 외면하거나, 대제사장들처럼 위선에 빠지지 않고, 부활의 능력 속에서 참된 평강과 자유를 맛볼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이 우리에게 던지는 깊은 메시지이며, 장재형목사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설교와 성경강해에서 강조해 온 핵심 진리입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혹독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그러므로 이 복음이야말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소망의 소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요 8:32). 그리고 그 진리는, 빌라도의 관정에 서신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놓치지 않고, 외면하거나 식상해하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되새길 때, 그때야말로 십자가가 새롭게 체험되고, 부활의 기쁨이 우리를 변화시키며, 진리에 속한 자의 삶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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