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에서와 야곱의 대조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설교한 창세기 25장은 아브라함의 손자들이자 이삭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어떻게 태어났고, 그들의 삶이 어떻게 갈림길에 들어서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이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장자의 명분을 가진 에서와 그 뒤를 이어 태어났지만 결국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는 야곱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고대 근동의 유목민 사회에서 장자는 가문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재산의 상당 부분을 이어받을 뿐만 아니라 가문에서 정신적·영적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는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따라서 장자권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지키거나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매우 드라마틱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
에서와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에서는 피부가 붉고 전신에 털이 많아, 후에 ‘에돔(붉다)’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그는 사냥에 능숙했고 바깥들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야곱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사람이었으며, 장막 안에 거주하기를 좋아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창 25:27). 유목민족의 생활 환경을 생각해 보면, 들에서 사냥을 통해 식량을 구해오는 에서는 ‘전형적인 장자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가운데 먼저 태어났으므로, 사회적·문화적으로 장자 자리에 오를 자격을 갖추었다. 이삭도 에서가 사냥해 가져오는 고기를 좋아했기에 그를 편애했다고 한다(25:28). 그러나 장자의 명분이 단순히 “누가 먼저 태어났는가”에만 달려있는 것은 아님을 이 본문은 극적으로 보여준다.
에서와 야곱의 운명이 반전되는 중요한 장면은 창세기 25장 29절 이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심히 피곤했다. 그 피곤을 해결하기 위해 야곱이 쑤어 놓은 ‘붉은 것’을 달라고 요구한다(25:30).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마음가짐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야곱은 평소에 조용하게 장막을 지키던 인물이었다고는 하나, 축복과 장자권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에서가 사냥을 통해 가정을 위해 음식을 가져오는 데 집중하는 동안, 장막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꾸준히 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에서가 “붉은 죽 한 그릇”을 달라고 하자, 야곱은 단순히 죽을 주는 것을 넘어 장자권을 달라고 요구한다. 사실 한순간에 그런 제안을 했다고 보기에는, 야곱의 의도가 꽤 구체적이고 계산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기회를 엿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 에서가 극도로 배고파하고 피곤해 있는 상황에서 야곱이 장자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에서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25:32)”라며 무심코 뱉은 말은 그의 운명을 갈라놓는 치명적 실언이 된다. 굶주리고 지쳐서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그 순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어느 정도 동정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에서의 그 한 마디를 두고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라(25:34)”라고 평한다. 결국 배고픔이라는 일시적 욕구 앞에서 영적·역사적 가치를 가진 장자권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과연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은 어느 정도의 의미였을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장자권은 단지 재산을 물려받는 권한이나 가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위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별히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곧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된 복의 계승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도 에서는 그 소중한 언약의 계승권을, ‘배고픔을 해결할 붉은 죽 한 그릇’에 너무나도 쉽게 넘겨버렸던 것이다.
야곱에게는 이러한 장자권이 매우 중요했다. 그는 복을 놓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물론 이 과정이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형을 ‘속이는’ 행위로도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훗날 이삭이 노년에 눈이 어두워 축복 기도를 할 때에도, 야곱은 리브가의 조언으로 형 에서인 척 변장하여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가로챈다(창 27장). 그 점에서 야곱의 행위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교활하거나 사기꾼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창세기 전체 흐름 안에서 이 사건을 이해해 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야곱 안에 얼마나 컸는지를 엿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본문을 설교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단지 어떤 ‘운명론’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선택과 결단 과정을 통해 주어진다고 강조해 왔다. 에서가 아무리 ‘장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도, 그 내면에 하나님의 언약과 가문의 복을 이어갈 믿음의 태도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그 복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야곱처럼 처음에는 큰 능력이나 인간적인 매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복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복을 지키려 하는 열심과 결단이 있다면, 결국 그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복을 받은 자가 그 복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복을 받지 못한 자가 오히려 복을 받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영적 태도를 점검하게 만든다. 에서가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 장자권을 팔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미 그의 내면에는 ‘장자의 명분’을 그리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태도가 쌓여 있었을지 모른다. 야곱은 평소에도 꾸준히 장막 안에서 죽을 쑤며 ‘가정의 터전’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에서가 사냥하러 나가 있을 때 야곱이 장막에서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장자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준비했으리라는 점은, 결국‘결정적 순간’에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런 순간은 계속 찾아온다. 운명처럼 보이는 상황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기도 하고,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단지 운명적인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우리의 선택과 결단이 작용하고, 그 선택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에서가 배고픔이라는 일시적 욕구에 굴복했듯, 우리 또한 순간적인 유혹이나 현실적 필요 앞에서 영적인 가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내가 죽게 될 것 같다’ 해도, 하나님의 언약과 인도하심을 지키려는 태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야곱의 사례는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차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이 본문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야곱이 한 번 팥죽을 끓여놓고 형을 유혹했다기보다, 오랜 시간 야곱이 장막을 지키며 가족을 돌보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안에서 ‘기회의 때’를 기다렸을 가능성이 크다. 에서 또한 한순간의 피곤과 배고픔만이 아니라, 이미 내면에 하나님의 복을 가볍게 여기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때문에 성경은 이 사건을 단지 “형을 속이고 빼앗은 복”이라고만 기록하지 않고,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분명히 못박는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영적 가치와 책임을 소홀히 하는 자에게는 복이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 복을 마땅히 이어받을 태도가 안 되어 있다면, 결국 그 복은 다른 이에게 넘어갈 수 있다.
이처럼 장자의 명분을 두고 에서와 야곱이 보여준 태도는, 단순히 그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온 민족,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전체의 흐름과도 직결된다. 야곱이 훗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장자’라는 외형적 지위만을 따르지 않고, 영적인 소중함을 붙들고자 애쓰는 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이, 에서와 야곱의 대조를 통해 선명히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우리는 매일 ‘장에서와 야곱 사이’를 오가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순간의 배고픔이나 유혹에 굴복해서 장자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마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힘들고 배고파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서 끝까지 지켜내고자 하는 결단으로 살아갈 것인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결단의 태도는 한 순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습관과 믿음의 자세 속에서 다듬어진다. 결국 그것이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수동적 운명론이 아닌, 능동적인 선택을 통해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이렇듯, 창세기 25장 27-34절은 에서와 야곱의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누구에게 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야곱은 비록 사람의 눈에 교활해 보이고, 형을 속여 복을 빼앗은 인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복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다. 에서는 정반대로, 눈앞의 욕구를 채우는 데 급급했다. 그리고 그는 결국 큰 자리를 잃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마다 이런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선다. 과연 우리는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장재형 목사”가 말하듯, 영적인 가치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다면, 우리 또한 야곱이 누린 축복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역사와 신앙적 승계
에서가 배고픔 앞에서 장자권을 포기함으로써, 야곱은 명분상 장자의 권위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명분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축복, 곧 이삭의 입을 통해 임하는 복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야곱과 리브가는 또 한 번 결단을 내린다. 눈이 어두워진 이삭이 에서를 불러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을 때, 리브가는 재빠르게 야곱을 재촉한다. 결국 야곱은 염소 새끼를 잡아 별미를 만들고, 형의 옷을 입고 털로 자신의 팔을 감싸서 이삭을 속인다(창 27장). 이것은 분명히 인간적으로 보면 ‘속임수’가 맞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과정마저 결국 ‘야곱에게 축복이 임하는 통로’로 사용하신다.
“장재형 목사”가 주목하는 것은 야곱의 내면이 어떤 상태였을까 하는 점이다. 야곱은 형처럼 털이 많지 않았다. 리브가가 권면을 하긴 했지만, 야곱도 ‘아버지에게 들키면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말한다(창 27:12). 결국 그는 가족의 문제로 인해 두려워하고 망설이기도 하지만, 어머니 리브가의 말에 순종하며 행동한다. 이처럼 야곱은 많은 결점을 갖고 있었다. 처음부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강점은 ‘복에 대한 강력한 집착과 결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요소는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이다. 야곱이 끝내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혼자만의 지혜나 힘이 아니라, 리브가라는 조력자의 현명한 판단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영적 공동체 안에서의 ‘전수’와 비슷한 맥락이다. 새 신자가 복음을 처음 접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 때, 믿음의 선배나 영적 지도자의 도움이 없으면 성장이 어려울 수 있다. 야곱도 리브가의 지혜가 없었다면, 형 에서를 ‘속이려는’ 시도 자체를 엄두조차 못 냈을 수 있다. 오히려 들키면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지혜자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그는 마침내 축복을 받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속임수와 논란이 발생한다. 하나님의 역사가 ‘왜 이렇게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뤄지는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죄 많고 어리석은 인간의 역사에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며, 그 가운데서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줄곧 보여준다. 에서의 실책과 야곱의 집착, 리브가의 편애와 이삭의 편애까지, 가족 내부의 복합적 상황을 통해 하나님은 결론적으로 ‘야곱에게 언약의 계승권’을 넘기신다.
그렇다면 에서는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창 25:34)”는 것이 결정적이다. 이 표현에는 그의 무감각한 영적 상태가 함축되어 있다. 그는 나중에 축복을 빼앗긴 사실을 알고 아버지에게“제게도 축복을 해주소서”라며 울부짖는다(창 27:34).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장자의 명분을 쉽게 판 그 순간부터,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최종 축복을 선언한 순간부터, 그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다. 이를 단순히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에서의 내면이 준비되지 않았고, 그 복을 감당할 만한 책임감이나 열망이 없었던 것도 크다.
우리는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와도 비교해볼 수 있다. 가인과 아벨은 같은 부모 아래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다. 성경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한다(창 4:4-5).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가인의 마음가짐이 문제였던 것으로 본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네 앞에 엎드려 있다.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창 4:7 참조). 그러나 가인은 분노에 사로잡혀 아벨을 쳐 죽인다. 결국 그도 하나님의 복과 언약에서 멀어지고 만다. 에서와 가인은 ‘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었다. 그로 인해 결국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주인공 자리를 놓치게 된다.
반대로 아벨과 야곱은 인생에서 약자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더 강력한 열망과 믿음의 태도를 보여준다. 특별히 야곱의 경우, 외면상으로는 내세울 것이 없었고, 성품상으로도 부족함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언약과 복에 집착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준다. 복을 받은 자가 어떻게 그 복을 지켜낼 것인가?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에게 그 복을 허락하실 것인가? “장재형 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운명론은 없다”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결단, 그리고 그것을 위해 부단히 준비하고 행동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다.
또한 창세기 25장 23절을 보면,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예언적인 말씀이 이미 리브가에게 주어진다. 즉,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자동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 섭리에 합당한 사건, 그리고 그 섭리를 붙드는 사람의 결단이 함께 작용했다. 결국 그 과정에서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사고, 또 이삭의 축복까지 손에 넣으면서, 하나님의 예언적 말씀이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삶을 돌아보면, 혹시 우리는 ‘에서’처럼 하나님의 복과 언약을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깐 기도하거나, 예배 자리에서 형식적으로 앉아 있거나, 삶에서 은근히 세속적 욕망에 휘둘리면서도 ‘내가 그리스도인이지, 복을 받은 사람이니까 문제 없을 거야’라고 안심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이 필요하다. 에서는 ‘배고파 죽겠다’라는 현실적인 필요 앞에서 너무 쉽게 결단을 내려버렸다. 우리의 현실도 사실상 별반 다르지 않다. 돈과 빵, 세상적 성공, 쾌락 등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 그때마다 우리는 야곱처럼, 설령 지금 당장은 힘들고 배고프더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영적 가치를 붙들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야곱 같은 결단력을 가지려면, 우리의 옛 자아가 매일 죽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라는 선언은, 단순히 신앙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할 진리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결단할 때, 우리는 야곱처럼 ‘복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빵과 돈에 대한 집착, 즉 맘몬 숭배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의 감격,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이 우리의 중심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만족을 누릴 수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야곱이 처음부터 완벽하거나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머니 리브가의 조언 없이는 제대로 행동하기 어려웠으며, 형에게 들킬까 봐 떨었던 연약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고, 리브가의 말을 믿고 따르며, 결국 축복을 손에 넣었다. 이것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복음 안으로 들어올 때, 어떤 영적 멘토나 선배의 안내와 도움이 없으면 성장을 이뤄내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본인이 복에 대한 열망을 가지느냐이다. 리브가는 야곱을 도울 수는 있어도,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향한 갈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면, 복은 그의 몫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이 더 깊이 있게 다가오는 지점은, 이것이 단순히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인생의 최우선 순위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라는 점이다. 에서의 실수는 그저 팥죽 한 그릇을 사먹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장자의 명분”, 곧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가볍게 여기고 팔아버렸다는 데 있다. 성경은 이를 결코 사소한 일로 보지 않는다. 에서를 두고 “음행하는 자 혹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처럼 경계하기까지 한다(히 12:16). 이처럼 일시적인 욕구에 굴복하는 것은 결코 하찮은 죄가 아니며,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실패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야곱의 승리는, 그가 훗날 어떤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에가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별다른 능력을 뽐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 순간에 장자권을 붙들었고, 이후에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빼앗고 난 후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면서 많은 고난을 겪는다. 이 고난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에서의 체험’(창 28장) 등을 허락하신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는 실제적 과정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한다. 야곱은 복을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일이 잘 풀린 것이 아니라, 가족을 떠나야 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여러 고초를 겪어야 했다(창 29-31장).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그는 ‘이스라엘’로 변화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고, 결국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굳게 서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서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눈앞의 배고픔이나 재정적 어려움, 조직 운영의 복잡함,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등은 늘 우리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우리는 순간순간 “이제 더 버틸 힘이 없다. 그냥 여기서 포기하자”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그때마다 에서를 떠올려야 한다.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근본적인 언약과 사명을 저버리는 결정을 하진 않는지. “장재형 목사”가 반복해서 말하듯이,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이 복음을, 이 언약을, 이 역사를 팔아먹지 않았다.” 이 고백이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장자의 명분을 지키는 이래 실패한다면, 후대에 가서는 “왜 당신들은 그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했는가” 하는 책망을 면치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다음 세대가 “아버지 어머니, 혹은 믿음의 선배들이 왜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눈앞의 유익을 쫓았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결말이다. 야곱은 비록 배고프고 약했으나, 결코 팔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내게 맹세하라. 이것을 내게 팔라. 하나님께 맹세하라.”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이는 그가 신앙적으로 얼마나 절박하고도 진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창세기 25장 27-34절은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에서가 당연히 장자이지만 가볍게 팔아넘기는 순간 운명이 바뀌고, 야곱은 부족한 사람이지만 복에 대한 갈망으로 운명을 바꾸어 잡아챈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갈림길에서 에서는‘붉은 죽’에 불과한 세상의 욕구에 굴복했고, 야곱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향해 뛰어들었다. 물론 야곱이 그 과정에서 보여준 수단이 결코 이상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수단의 옳고 그름을 넘어, ‘누가 복에 대해 진정한 열망을 품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가 단지 옛날 가족사나 형제 간의 다툼을 기록한 일화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인생에 직접적인 도전과 교훈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첫째, 운명론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으로 복을 계승하지 않는다는 점은, 아무리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나고 교회에서 오래 생활했어도, 스스로 영적 가치를 붙들지 않으면 의미가 없음을 시사한다. 둘째, 장막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야곱은 들로 나가 사냥을 하기보다는 장막 안을 지키며 가족을 돌보았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지키려는 태도’가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셋째,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지 않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평소에는 조용했을지 몰라도, 장자의 명분을 넘겨받을 때, 그리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챌 때 야곱은 과감히 행동했다. 그 결과 그는 결국 승리자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는 ‘복음을 전수해 주는 영적 부모’ 혹은 ‘지혜자의 도움’이다. 리브가가 없었다면 야곱은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고, 또 자칫 큰 봉변을 당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믿음의 선배와 영적 지도를 받는 과정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복을 붙드는 것은 본인의 몫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에게 어떤 경로로든 복을 허락하시고, 그 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복은 단지 재물이나 세상적 성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언약 가운데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유산이요,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특권이다. 에서처럼 이를 헐값에 팔아치울 수도 있고, 야곱처럼 집요하게 붙들 수도 있다. 누가 보기에 교활해 보일지라도, ‘결단하고 순종하고 지혜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결국 그 사람에게서 빛을 발하게 된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누누이 강조하는 교훈이다. 교회 안에서나 개인적인 영성 생활에서나, 우리는 야곱의 집요함과 결단력을 배워야 한다. 복은 쉽게 얻는 것이 아니며, 그 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인내와 헌신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날마다 죽는” 영적 훈련으로, 세상의 욕망과 헛된 우상 숭배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이처럼 야곱의 이야기 안에는 당시 가족사와 사회문화적 배경 이상의 깊은 신앙적 통찰이 자리 잡고 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던 에서는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거대한 영적 유산을 놓쳤고, 야곱은 그 기회를 붙들어‘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눈앞의 유익 때문에 영적 가치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동시에, 비록 연약하고 부족해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복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자를 들어 쓰신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창세기 25장의 이야기는 결코 옛날 한 가정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곧 메시아의 족보로 이어지며, 결국 인류 구원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이 복음 위에 서 있고, 우리 각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에 동참하게 되었다.
“장재형 목사”가 설교를 통해 거듭 강조하는 것은, ‘운명론’이 아니라 ‘믿음의 결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라고 하셨지만, 야곱 스스로 그 예언적 말씀을 붙들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언약과 비전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을 붙들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과 결단이 없다면, 그 복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명료한 교훈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날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적용된다.
창세기 25장 27-34절에 기록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일깨운다. 첫째, 배고픔이나 세상적 욕망 등 일시적이고 육적인 만족을 위해 영적인 가치를 팔아버리는 태도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에서는 그 후로 아무리 울부짖어도 잃어버린 복을 되찾지 못했다. 둘째, 야곱처럼 비록 연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복을 놓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자는, 설령 인간적인 약점이 있을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한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도 세상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다양한 갈림길과 선택의 순간이 온다. 그때마다 야곱의 지혜와 결단, 그리고 리브가를 통한 영적 전수와 지도를 떠올리며, 우리가 자칫 ‘붉은 것’에 눈을 빼앗기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장재형 목사’가 역설하듯이, 하나님의 역사는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선택하고 결단할 때 비로소 우리 삶에 실현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에서와 야곱의 서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본질적이며도 실제적인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