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1. 전도서와 지혜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전도서를 ‘지혜서’로 분류하여 성경 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지혜서로서의 전도서는 인간의 지혜가 단순한 ‘지식 축적’이나 ‘삶의 경험치’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므로써 얻게 되는 영적 통찰임을 드러낸다. 특히 전도서와 잠언서가 가진 공통된 분류인 지혜서의 특성과, 또 각각이 보여주는 독특한 메시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잠언서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지침을 “여호와 경외”라는 큰 주제를 기반으로 제시하며, 전도서는 좀 더 존재론적인 질문, 곧 ‘인생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헛되다는데 그것의 참 의미는 무엇인가?’ 등의 근본적이고 직설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것이다.

전도서의 대표적인 키워드는 ‘허무(헛됨)’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허무라는 단어를 종종 영어 성경에서 번역된 ‘meaningless’와 비교하여 설명하며, 그 의미가 단순히 “모든 것이 의의나 가치가 없다”라는 수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인간 실존이 가진‘무(nothingness)’로 돌아가는 운명적 속성을 지적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전도서의 서두와 결말에서 동일하게 선언되며, 저자인 ‘전도자(전도서 저자)’가 인생의 본질에 대해 비관적이고 삭막한 통찰을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이 비관적 결론이 오히려 영적 의미를 가장 깊이 드러내는 장치라고 설명한다. 전도서는 계속해서 인간이 지적 능력(전 1장)과 육체적 쾌락 및 재물(전 2장)을 다 누릴지라도 결국에는 모두 헛됨으로 귀결된다고 강조한다. 이 ‘헛됨’은 시간을 소유한 인간이 결국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 ‘유한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하나님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나 영원한 가치를 찾기 어려움을 드러낸다.

따라서 전도서는 지혜서로서 인간이 쉽게 놓칠 수 있는 두 가지 전제를 상기시킨다. 하나는 ‘인간은 죽는다’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처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모든 인류에게 변함없이 주어진 원리임을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한다. 이는 전도서가 말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인간이 가진 시간, 재능, 물질, 어느 것 하나도 죽음 이후에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근본을 성찰하게 만든다. 다른 하나는, 인간 안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동물이 자신의 죽음 이후의 세계나 본질적 목적에 대해 사색하지 않는 반면, 인간은 누구나 ‘죽음 너머는 어떻게 되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궁금해한다는 점을 들어, 이것이 곧 하나님이 넣어주신 영원의 갈망이라고 주장한다.

장재형목사는 전도서가 “인생이 헛되다”라는 선언에서 시작해 마지막 12장에 이르러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는 권고로 이어지는 전개가 지혜서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본다. 이처럼 자신의 존재가 결국 헛됨으로 끝나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청년의 때’—이는 단순히 나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마음의 순수성과 신앙의 열정이 가장 생생히 발현되는 때를 상징한다—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붙드는 것이 곧 참된 지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전도서 12장 8절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결론 역시, 인생의 모든 것(소유, 지식, 명예 등)이 마침내 헛됨을 확인시켜주고, 이것을 반면교사 삼아 인간의 영적 본질을 깊이 일깨우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잠언서의 핵심 명제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또는 지혜)의 근본”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고 학문이 발전한다 해도, “여호와 경외”라는 영적 기초가 없다면 결국 그 지식은 제한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그치며, 전도서가 말하는 ‘헛됨’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결국 ‘전도서와 잠언서’라는 지혜서의 쌍은, 경외함(잠언서)과 허무(전도서)라는 상이해 보이는 개념이 긴장과 균형을 이루며 인간의 실존과 신앙을 통찰하도록 돕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지혜서의 가르침을 각 시대와 세대에 맞추어 적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고, 청년뿐 아니라 모든 연령대가 인생의 무상함을 외면하지 말고, 그 자각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전도자의 메시지를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덧붙여, 전도서 3장 1절과 3장 11절을 연결해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전 3:11)라는 두 본문은 모두 인생의 유한한 시간과 하나님의 영원하심, 그리고 인간이 직면하는 신비와 경외심을 말한다. ‘때’는 단순히 흐르는 시간(Time)만을 말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는 특정 시점(Date)의 도래를 포함한다. 장재형목사는 “우리 안에 있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결국 이 땅의 일시적이고 유한한 시간성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영원 안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동력이 된다고 풀이한다. 이처럼 전도서는 지혜의 책으로서 기독교 신앙인에게 ‘우리 삶을 통찰하라, 죽음을 인식하라, 영원을 바라보라’라는 직접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전할 때, 청년이나 노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실은, 결국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으며, 그 앞에서 모든 소유와 지식, 명예가 무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이는 전도자가 선언하듯 허무이지만, 동시에 그 허무함을 깨달은 이들에게는 하늘의 지혜가 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오히려 이러한 허무와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비극을 넘어서는 길(beyond tragedy)을 열어준다고 말한다. 이 비극을 넘어서는 길의 해답은 전도서의 맥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약 성경에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과 천국’이라는 결론과 만나게 된다. 따라서 전도서가 보여주는 헛됨의 선언은 마치 인간이 갈증을 느껴야 물을 찾듯이, 영적인 갈급함을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하고, 그분 안에서 진정한 생명의 길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과학자들의 관점에도 주목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우주의 섬세한 질서와 그 거대함 앞에서 경외심을 느끼고, 그 경외심이 결국 신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이끌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로마서 1장 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복잡하고 정교한 자연 세계를 보면, 그 질서를 부인할 수 없게 되고, 그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전도서가 말하는 허무는 인간 존재의 미약함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와 그 안에 담긴 영원한 섭리를 인식하도록 안내하는 통로가 된다. 삶의 본질을 깨닫고자 하는 지혜자의 길이 곧 전도자가 강조하는 “죽음을 인식하고 창조주를 기억하는 길”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전도서가 ‘늙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선언하는 장면에서, 인간의 구체적 노화 과정(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다리가 떨리고, 이가 빠지는 등)을 예로 들어 삶이 얼마나 빠르게 쇠퇴해가는지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황혼기에 비로소 삶의 목적을 고민하는데, 그때는 이미 몸과 마음이 시들어버려 움직임이 어려울 때가 많다. 결국 하나님을 믿고 영원을 바라보는 지혜는 청년기부터, 곧 가장 왕성하고 열정적인 시기에 시작되어야 한다는 성경적 권고가 여기에 담겨 있다. 즉 ‘헛됨’을 알되 그 헛됨에 갇혀 비관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디딤돌 삼아 참된 생명의 길을 찾게 하는 것이 전도서가 주는 궁극적 가르침이라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핵심 메시지다.

이렇게 전도서가 말하는 허무, 죽음, 그리고 ‘창조주 기억’의 구도는 청년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전 과정을 꿰뚫는 보편적이면서도 강렬한 주제다. 장재형목사는 이 메시지를 반복해서 설명하며, 교회 안팎의 모든 사람이 전도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영원에 대한 갈망’을 마음 깊이 새기길 촉구한다. 특별히 교회가 어린 시절부터 이 진리를 가르쳐야 하며, 자라나는 세대가 어릴 때부터 인생의 본질과 그 마지막을 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적 존재이며, 진리를 사모하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의 소망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잠언서로 대표되는 “여호와 경외”의 길과 전도서가 보여주는 “인생의 허무와 창조주 기억”이라는 길은 본질적으로 같은 열매를 맺는다고 장재형목사는 주장한다. 지혜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것이다. 그 경외심으로부터 모든 참된 가치와 의미가 흘러나오기에,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위대해도 하나님이 없는 지식은 결국 부분적 성찰이나 일시적 유익을 넘어 eternal value(영원한 가치)로 승화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전도서를 강조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인간은 유한하고, 죽음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 참된 지혜는 창조주를 기억하여 영원을 붙드는 것이다”로 정리된다. 그는 이를 각종 비유와 성경 예시를 들어 설파하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뿐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전도서의 메시지가 유효함을 역설한다. 만약 우리가 이 깨달음을 놓치고 살면, 한평생 애써 쌓아 올린 것들이 어느 순간 허무하게 사라지는 과정을 맞닥뜨리며,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서가 말하는 진정한 지혜를 붙들 때, 우리 삶은 하나님이 만드신 때(Time)와 목적(Date)를 향해 열려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비로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의 진정한 의미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라고 장재형목사는 가르친다.

2. 인간의 유한성과 영원에

장재형목사가 전도서를 통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인간의 삶이 왜 헛된가?”, 그리고 “그 헛됨을 넘어서는 길은 무엇인가?”이다. 이는 곧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의 소망을 대비시킴으로써 더욱 선명해진다. 그가 말하는 유한성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 안에 있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킨다. 아무리 높은 지식을 쌓고, 재물을 거두고, 쾌락을 누려도, 인생의 종국에 닥쳐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전도자는 이를 ‘헛됨’이라는 단어로 반복해서 강조했고, 장재형목사는 그 ‘헛됨’을 성경적 언어로 ‘무(無)에 대한 회귀’ 또는 ‘궁극적 소멸’로도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렇게 ‘허무함’을 주셨는가? 여기에 대한 답으로 장재형목사는 전도서 3장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는 구절을 중심에 둔다. 인간 안에 있는 영원에 대한 갈망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동물은 존재의 의미에 대해 사색하지 않고,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만은 왜 존재하고, 왜 죽어야 하며,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는지 늘 궁금해 한다. 이런 영적 갈망이 바로 전도서가 말하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일종의 ‘내면화된 신앙 본능’으로도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신앙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우주적 경이로움이나 생명의 신비를 깨닫는 순간, 신적 존재를 자연스레 궁금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갈망을 때로는 세상적 쾌락, 재물, 권력으로 채워보려 시도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지적한다. 전도서 1~2장에서 전도자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낙과 즐거움을 누려보았지만, 모두 일장춘몽처럼 사라지고 또 헛되었음을 고백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가 제공하는 각종 물질적 풍요와 오락, 정보의 홍수는 인간의 영적 갈망을 온전히 채워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 갈망은 점점 더 큰 갈증을 낳을 뿐이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삶은 맹목적인 ‘노력’과 ‘축적’을 계속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것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을 결국 직면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때, 전도서가 선언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결론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한다. ‘허무’를 자각했다는 것은, 그 자각을 통해 진리이신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렸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한계를 깨달았을 때, 우리의 눈은 자동으로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에게 돌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성적인 계몽이나 도덕적 완벽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해결책을 통해서만 극복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구체적으로 신약성경이 전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죄와 죽음의 권세가 깨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이야말로 전도서가 제기한 허무 문제의 최종 해답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인생을 사는 것이냐, 죽어가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비극적 실존이다. 그러나 이 비극을 넘어서는 길(beyond tragedy)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생’과 ‘천국’의 소망을 붙드는 것밖에 없다. 그렇게 할 때, 전도서가 지적한 허무의 심연을 통과하여 오히려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전환이 일어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두 가지 시각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로, “우리 안에 더 귀한 것이 이미 있다.” 이는 사도행전 3장 6절에서 베드로가 말한 “은과 금은 내게 없으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라는 표현에 착안한 것이다. 즉, 물질적 소유나 세상적인 권력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는 이미 참되고 영원한 가치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현재가 영원과 이어져 있다.” 이는 우리의 순간적 삶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계속 이어진다는 인식이다. 믿음 안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된다. 신학자들이 말하는 ‘영원한 지금(eternal now)’이라는 개념이 여기 해당한다. 결국 인간이 겪는 모든 비극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그 비극적 현실이 영원을 향해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관점을 전하며, 교회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인간의 본질을 깨달은 신앙인은 소유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 4:19)고 하셨고, 마지막으로 승천하시기 전에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명하셨다. 이른바‘대사명(Great Commission)’이다. 그러나 소유에 묶여 물질적 안일만을 추구한다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상황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기독교 신앙인의 메시지를 “소유를 극복하라”로 압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우리가 필요를 위해 노동하고 재화를 벌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더 큰 가치—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마 6:33)—를 추구해야 비로소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이 땅의 시한부 삶”을 살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관점”을 품고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공동체로서 이 같은 진리를 실천하려면, 갈라디아서 6장 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라는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믿음 안에서 함께 짐을 지는 태도가 바로 ‘그리스도의 법’이며, 이 법이 지켜질 때 교회는 세상과 다른 사랑과 섬김의 문화를 이뤄갈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착각은, ‘힘든 짐을 남에게 지우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오히려 예수님의 모범이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희생적 사랑”이었음을 상기시키며, 우리가 서로에게 그렇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태도를 보일 때 교회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의 선교와 전도를 감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 장재형목사는 역사적 맥락에서도 시선을 확장한다. 교회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조직과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고, 또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28:19~20)고 하셨기에, 실제로 선교와 전도의 기초를 다질 만한 본부(센터)나 시설, 문화적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재정적, 조직적 기반이 갖춰지는 것을 ‘소유의 축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으나, 장재형목사는 주어진 목적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 이 모든 것을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그 소유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느냐, 아니면 개인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붙들고 있느냐 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재형목사는 자신이 속하거나 혹은 이끌어온 공동체 역사에서, 아무것도 없던 시절부터 달려온 28년의 과정(혹은 그 이상의 세월)을 종종 언급한다. 그는 “처음에는 가진 것이 없었을 때, 하박국 3장 17절~18절 말씀을 붙들고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라는 찬양을 불렀다”고 간증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다양한 터전이 마련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이 단순한 부가 아니라 ‘사람들을 케어하고, 문화권별로 복음을 나누며, 전 세계를 향해 선교하기 위한 도구’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도서를 통해 배우는 인간 삶의 허무, 그 허무 앞에서 우리가 필사적으로 의지해야 할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잃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소유했을 때도 겸손히 그 소유를 하나님의 목적에 맞추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인생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올바로 구분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전도서 12장에서 말하는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는” 장면과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 돌아간다”(전12:7)는 말씀은, 사람에게 ‘언젠가 닥칠 피할 수 없는 마지막’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종말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교만과 욕심을 내려놓고, 참된 가치인 ‘영적인 것’을 붙잡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전도서 12장 전체가 보여주는 노화 과정의 묘사(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어두워지며, 이가 빠지고, 살구나무 꽃이 필 정도로 백발이 된다는 상징) 속에서 우리 각자가 결국 늙고 쇠퇴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주변 사람들을 살리고 사랑하는 쪽으로 향해야 함을 깊이 깨닫게 된다고 해설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역설하는 핵심은, 전도서가 말하는 ‘허무’가 결코 허무주의의 교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인의 성장을 촉진하는 통찰의 매개체다. 죽음을 아는 사람은 삶의 가치를 더욱 절실히 깨닫고, 소유나 권력에 매달리는 우매함을 피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보면서,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말씀처럼 서로 짐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려는 동기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주님 오심을 예비하는 강림절(성탄절) 같은 절기를 맞을 때마다, 이 메시지를 더욱 강하게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영원으로 초대하셨다”라는 사실을 되짚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함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원한 세계, 즉 천국의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이 성탄절의 진정한 기쁨이니,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축하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인생이 화살같이 지나간다”라는 인식을 가질 때,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게 된다고 강조한다. 전도서 3장이 말하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을 이룰 때가 있다’는 원리는, 신앙인이라면 더욱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말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오늘 하라. 오늘 할 수 있는데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경구가, 영적 차원에서 비롯된 진리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교회 사역과 선교 전략에도 적용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는, 주어진 때와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청년 전도를 먼저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직 인생의 결정을 하기 전에, 비교적 마음이 열려 있고, 세상의 경험에 깊이 물들지 않은 청년들이 복음을 영접했을 때 그 열매가 크다고 본다. 물론 모든 연령대가 필요하지만, 전도서 12장 1절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처럼, 가장 왕성한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전도서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지녔고, 그 영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핵심 요약에 맞닿아 있다. 인간의 유한성을 모른 척하거나 애써 부인하는 삶은 결국 헛된 욕망과 맹목적 활동으로 가득 차게 되고, 마지막에는 허무로 끝난다. 반면 자신의 유한함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생을 붙드는 자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하게 되며, 이웃을 살리고 복음을 전하는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진정한 지혜의 길이며, 전도자가 본래 강조했던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선언이 우리에게 던지는 역설적 선물이다.

장재형목사는 전도서와 잠언서가 함께 이루는 지혜서적 통찰을 통해 교회와 성도들에게 ‘헛됨’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바로 그 ‘헛됨’을 마주하는 순간, 하나님의 존재, 천국, 그리고 영생이라는 소망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각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대사명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하는 가장 큰 동기이다. 죽음 앞에서 허무할 수밖에 없는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으로 연결되어 궁극적 승리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삶을 진정 의미 있게 사는 길은, 바로 이 영원에 대한 갈망과 신앙적 확신을 붙드는 데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 메시지를 날마다 전하며,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일깨우도록 부름받은 존재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비로소 청년들도, 중장년과 노인들도, 자신의 생애가 결코 우연한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안에 있는 섭리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고, 전도서가 말하는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쌓아도, 자신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거듭 일깨운다. 성경 전체가 증언하듯이,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른다. 그렇기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이고 부패하는 가치를 초월해, 영적 진리에 접근하도록 안내한다. 이 마음이 없다면, 사람은 금세 자기만의 기준(norm)을 만들고, 타인의 기준과 충돌하며, 인생을 공허하게 마무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의 질서를 인정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를 붙든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절망 대신 소망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전도서가 말하는 헛됨은 결국 우리를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이끄는 통로이며, 이 통찰을 주는 지혜서의 가르침은 모든 세대를 살릴 수 있는 강력한 말씀임을 장재형목사는 끝까지 강조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서가 전하는 영원에 대한 갈망, 그리고 잠언서가 제시하는 여호와 경외의 원리를 항상 함께 가르쳐야 하며, 양 떼가 이 진리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전도서를 풀어내는 방식은 인생의 유한성과 영원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을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전도서가 선언하는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반복된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삶이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 때에만 참된 의미를 얻을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 은혜는 구약 시대 전도자의 탄식에 멈추지 않고,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완성된다. 이는 신앙에 있어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라는 점이 장재형목사의 핵심 주장이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는 권고에 담긴 시급함과 소중함, 그리고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 3:1)는 시간적 유한성의 경고 속에서, 우리는 지금 숨 쉬는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 영적 기회인지 재인식하게 된다. 그 기회를 붙들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가 누리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이 성탄절의 의미, 신앙인의 삶, 교회의 공동체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가르친다.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지 분별하고, 한계 속에서도 영원을 바라보며, 복음 전파와 섬김을 위해 ‘서로 짐을 지는’ 교회가 될 때, 전도서가 말하는 지혜가 실제로 구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 결국 모든 헛됨을 넘어 궁극적 생명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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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에서와 야곱

1. 에서와 야곱의 대조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설교한 창세기 25장은 아브라함의 손자들이자 이삭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어떻게 태어났고, 그들의 삶이 어떻게 갈림길에 들어서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이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장자의 명분을 가진 에서와 그 뒤를 이어 태어났지만 결국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는 야곱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고대 근동의 유목민 사회에서 장자는 가문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재산의 상당 부분을 이어받을 뿐만 아니라 가문에서 정신적·영적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는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따라서 장자권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지키거나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매우 드라마틱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

에서와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에서는 피부가 붉고 전신에 털이 많아, 후에 ‘에돔(붉다)’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그는 사냥에 능숙했고 바깥들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야곱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사람이었으며, 장막 안에 거주하기를 좋아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창 25:27). 유목민족의 생활 환경을 생각해 보면, 들에서 사냥을 통해 식량을 구해오는 에서는 ‘전형적인 장자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가운데 먼저 태어났으므로, 사회적·문화적으로 장자 자리에 오를 자격을 갖추었다. 이삭도 에서가 사냥해 가져오는 고기를 좋아했기에 그를 편애했다고 한다(25:28). 그러나 장자의 명분이 단순히 “누가 먼저 태어났는가”에만 달려있는 것은 아님을 이 본문은 극적으로 보여준다.

에서와 야곱의 운명이 반전되는 중요한 장면은 창세기 25장 29절 이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심히 피곤했다. 그 피곤을 해결하기 위해 야곱이 쑤어 놓은 ‘붉은 것’을 달라고 요구한다(25:30).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마음가짐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야곱은 평소에 조용하게 장막을 지키던 인물이었다고는 하나, 축복과 장자권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에서가 사냥을 통해 가정을 위해 음식을 가져오는 데 집중하는 동안, 장막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꾸준히 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에서가 “붉은 죽 한 그릇”을 달라고 하자, 야곱은 단순히 죽을 주는 것을 넘어 장자권을 달라고 요구한다. 사실 한순간에 그런 제안을 했다고 보기에는, 야곱의 의도가 꽤 구체적이고 계산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기회를 엿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 에서가 극도로 배고파하고 피곤해 있는 상황에서 야곱이 장자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에서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25:32)”라며 무심코 뱉은 말은 그의 운명을 갈라놓는 치명적 실언이 된다. 굶주리고 지쳐서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그 순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어느 정도 동정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에서의 그 한 마디를 두고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라(25:34)”라고 평한다. 결국 배고픔이라는 일시적 욕구 앞에서 영적·역사적 가치를 가진 장자권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과연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은 어느 정도의 의미였을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장자권은 단지 재산을 물려받는 권한이나 가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위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별히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곧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된 복의 계승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도 에서는 그 소중한 언약의 계승권을, ‘배고픔을 해결할 붉은 죽 한 그릇’에 너무나도 쉽게 넘겨버렸던 것이다.

야곱에게는 이러한 장자권이 매우 중요했다. 그는 복을 놓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물론 이 과정이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형을 ‘속이는’ 행위로도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훗날 이삭이 노년에 눈이 어두워 축복 기도를 할 때에도, 야곱은 리브가의 조언으로 형 에서인 척 변장하여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가로챈다(창 27장). 그 점에서 야곱의 행위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교활하거나 사기꾼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창세기 전체 흐름 안에서 이 사건을 이해해 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야곱 안에 얼마나 컸는지를 엿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본문을 설교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단지 어떤 ‘운명론’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선택과 결단 과정을 통해 주어진다고 강조해 왔다. 에서가 아무리 ‘장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도, 그 내면에 하나님의 언약과 가문의 복을 이어갈 믿음의 태도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그 복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야곱처럼 처음에는 큰 능력이나 인간적인 매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복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복을 지키려 하는 열심과 결단이 있다면, 결국 그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복을 받은 자가 그 복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복을 받지 못한 자가 오히려 복을 받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영적 태도를 점검하게 만든다. 에서가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 장자권을 팔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미 그의 내면에는 ‘장자의 명분’을 그리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태도가 쌓여 있었을지 모른다. 야곱은 평소에도 꾸준히 장막 안에서 죽을 쑤며 ‘가정의 터전’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에서가 사냥하러 나가 있을 때 야곱이 장막에서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장자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준비했으리라는 점은, 결국‘결정적 순간’에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런 순간은 계속 찾아온다. 운명처럼 보이는 상황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기도 하고,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단지 운명적인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우리의 선택과 결단이 작용하고, 그 선택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에서가 배고픔이라는 일시적 욕구에 굴복했듯, 우리 또한 순간적인 유혹이나 현실적 필요 앞에서 영적인 가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내가 죽게 될 것 같다’ 해도, 하나님의 언약과 인도하심을 지키려는 태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야곱의 사례는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차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이 본문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야곱이 한 번 팥죽을 끓여놓고 형을 유혹했다기보다, 오랜 시간 야곱이 장막을 지키며 가족을 돌보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안에서 ‘기회의 때’를 기다렸을 가능성이 크다. 에서 또한 한순간의 피곤과 배고픔만이 아니라, 이미 내면에 하나님의 복을 가볍게 여기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때문에 성경은 이 사건을 단지 “형을 속이고 빼앗은 복”이라고만 기록하지 않고,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분명히 못박는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영적 가치와 책임을 소홀히 하는 자에게는 복이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 복을 마땅히 이어받을 태도가 안 되어 있다면, 결국 그 복은 다른 이에게 넘어갈 수 있다.

이처럼 장자의 명분을 두고 에서와 야곱이 보여준 태도는, 단순히 그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온 민족,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전체의 흐름과도 직결된다. 야곱이 훗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장자’라는 외형적 지위만을 따르지 않고, 영적인 소중함을 붙들고자 애쓰는 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이, 에서와 야곱의 대조를 통해 선명히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우리는 매일 ‘장에서와 야곱 사이’를 오가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순간의 배고픔이나 유혹에 굴복해서 장자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마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힘들고 배고파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서 끝까지 지켜내고자 하는 결단으로 살아갈 것인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결단의 태도는 한 순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습관과 믿음의 자세 속에서 다듬어진다. 결국 그것이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수동적 운명론이 아닌, 능동적인 선택을 통해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이렇듯, 창세기 25장 27-34절은 에서와 야곱의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누구에게 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야곱은 비록 사람의 눈에 교활해 보이고, 형을 속여 복을 빼앗은 인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복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다. 에서는 정반대로, 눈앞의 욕구를 채우는 데 급급했다. 그리고 그는 결국 큰 자리를 잃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마다 이런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선다. 과연 우리는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장재형 목사”가 말하듯, 영적인 가치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다면, 우리 또한 야곱이 누린 축복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역사와 신앙적 승계

에서가 배고픔 앞에서 장자권을 포기함으로써, 야곱은 명분상 장자의 권위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명분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축복, 곧 이삭의 입을 통해 임하는 복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야곱과 리브가는 또 한 번 결단을 내린다. 눈이 어두워진 이삭이 에서를 불러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을 때, 리브가는 재빠르게 야곱을 재촉한다. 결국 야곱은 염소 새끼를 잡아 별미를 만들고, 형의 옷을 입고 털로 자신의 팔을 감싸서 이삭을 속인다(창 27장). 이것은 분명히 인간적으로 보면 ‘속임수’가 맞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과정마저 결국 ‘야곱에게 축복이 임하는 통로’로 사용하신다.

“장재형 목사”가 주목하는 것은 야곱의 내면이 어떤 상태였을까 하는 점이다. 야곱은 형처럼 털이 많지 않았다. 리브가가 권면을 하긴 했지만, 야곱도 ‘아버지에게 들키면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말한다(창 27:12). 결국 그는 가족의 문제로 인해 두려워하고 망설이기도 하지만, 어머니 리브가의 말에 순종하며 행동한다. 이처럼 야곱은 많은 결점을 갖고 있었다. 처음부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강점은 ‘복에 대한 강력한 집착과 결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요소는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이다. 야곱이 끝내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혼자만의 지혜나 힘이 아니라, 리브가라는 조력자의 현명한 판단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영적 공동체 안에서의 ‘전수’와 비슷한 맥락이다. 새 신자가 복음을 처음 접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 때, 믿음의 선배나 영적 지도자의 도움이 없으면 성장이 어려울 수 있다. 야곱도 리브가의 지혜가 없었다면, 형 에서를 ‘속이려는’ 시도 자체를 엄두조차 못 냈을 수 있다. 오히려 들키면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지혜자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그는 마침내 축복을 받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속임수와 논란이 발생한다. 하나님의 역사가 ‘왜 이렇게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뤄지는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죄 많고 어리석은 인간의 역사에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며, 그 가운데서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줄곧 보여준다. 에서의 실책과 야곱의 집착, 리브가의 편애와 이삭의 편애까지, 가족 내부의 복합적 상황을 통해 하나님은 결론적으로 ‘야곱에게 언약의 계승권’을 넘기신다.

그렇다면 에서는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창 25:34)”는 것이 결정적이다. 이 표현에는 그의 무감각한 영적 상태가 함축되어 있다. 그는 나중에 축복을 빼앗긴 사실을 알고 아버지에게“제게도 축복을 해주소서”라며 울부짖는다(창 27:34).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장자의 명분을 쉽게 판 그 순간부터,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최종 축복을 선언한 순간부터, 그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다. 이를 단순히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에서의 내면이 준비되지 않았고, 그 복을 감당할 만한 책임감이나 열망이 없었던 것도 크다.

우리는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와도 비교해볼 수 있다. 가인과 아벨은 같은 부모 아래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다. 성경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한다(창 4:4-5).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가인의 마음가짐이 문제였던 것으로 본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네 앞에 엎드려 있다.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창 4:7 참조). 그러나 가인은 분노에 사로잡혀 아벨을 쳐 죽인다. 결국 그도 하나님의 복과 언약에서 멀어지고 만다. 에서와 가인은 ‘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었다. 그로 인해 결국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주인공 자리를 놓치게 된다.

반대로 아벨과 야곱은 인생에서 약자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더 강력한 열망과 믿음의 태도를 보여준다. 특별히 야곱의 경우, 외면상으로는 내세울 것이 없었고, 성품상으로도 부족함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언약과 복에 집착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준다. 복을 받은 자가 어떻게 그 복을 지켜낼 것인가?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에게 그 복을 허락하실 것인가? “장재형 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운명론은 없다”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결단, 그리고 그것을 위해 부단히 준비하고 행동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다.

또한 창세기 25장 23절을 보면,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예언적인 말씀이 이미 리브가에게 주어진다. 즉,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자동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 섭리에 합당한 사건, 그리고 그 섭리를 붙드는 사람의 결단이 함께 작용했다. 결국 그 과정에서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사고, 또 이삭의 축복까지 손에 넣으면서, 하나님의 예언적 말씀이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삶을 돌아보면, 혹시 우리는 ‘에서’처럼 하나님의 복과 언약을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깐 기도하거나, 예배 자리에서 형식적으로 앉아 있거나, 삶에서 은근히 세속적 욕망에 휘둘리면서도 ‘내가 그리스도인이지, 복을 받은 사람이니까 문제 없을 거야’라고 안심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이 필요하다. 에서는 ‘배고파 죽겠다’라는 현실적인 필요 앞에서 너무 쉽게 결단을 내려버렸다. 우리의 현실도 사실상 별반 다르지 않다. 돈과 빵, 세상적 성공, 쾌락 등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 그때마다 우리는 야곱처럼, 설령 지금 당장은 힘들고 배고프더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영적 가치를 붙들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야곱 같은 결단력을 가지려면, 우리의 옛 자아가 매일 죽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라는 선언은, 단순히 신앙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할 진리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결단할 때, 우리는 야곱처럼 ‘복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빵과 돈에 대한 집착, 즉 맘몬 숭배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의 감격,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이 우리의 중심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만족을 누릴 수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야곱이 처음부터 완벽하거나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머니 리브가의 조언 없이는 제대로 행동하기 어려웠으며, 형에게 들킬까 봐 떨었던 연약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고, 리브가의 말을 믿고 따르며, 결국 축복을 손에 넣었다. 이것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복음 안으로 들어올 때, 어떤 영적 멘토나 선배의 안내와 도움이 없으면 성장을 이뤄내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본인이 복에 대한 열망을 가지느냐이다. 리브가는 야곱을 도울 수는 있어도,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향한 갈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면, 복은 그의 몫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2fuLEttN1gs

이 사건이 더 깊이 있게 다가오는 지점은, 이것이 단순히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인생의 최우선 순위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라는 점이다. 에서의 실수는 그저 팥죽 한 그릇을 사먹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장자의 명분”, 곧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가볍게 여기고 팔아버렸다는 데 있다. 성경은 이를 결코 사소한 일로 보지 않는다. 에서를 두고 “음행하는 자 혹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처럼 경계하기까지 한다(히 12:16). 이처럼 일시적인 욕구에 굴복하는 것은 결코 하찮은 죄가 아니며,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실패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야곱의 승리는, 그가 훗날 어떤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에가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별다른 능력을 뽐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 순간에 장자권을 붙들었고, 이후에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빼앗고 난 후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면서 많은 고난을 겪는다. 이 고난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에서의 체험’(창 28장) 등을 허락하신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는 실제적 과정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한다. 야곱은 복을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일이 잘 풀린 것이 아니라, 가족을 떠나야 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여러 고초를 겪어야 했다(창 29-31장).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그는 ‘이스라엘’로 변화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고, 결국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굳게 서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서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눈앞의 배고픔이나 재정적 어려움, 조직 운영의 복잡함,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등은 늘 우리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우리는 순간순간 “이제 더 버틸 힘이 없다. 그냥 여기서 포기하자”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그때마다 에서를 떠올려야 한다.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근본적인 언약과 사명을 저버리는 결정을 하진 않는지. “장재형 목사”가 반복해서 말하듯이,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이 복음을, 이 언약을, 이 역사를 팔아먹지 않았다.” 이 고백이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장자의 명분을 지키는 이래 실패한다면, 후대에 가서는 “왜 당신들은 그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했는가” 하는 책망을 면치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다음 세대가 “아버지 어머니, 혹은 믿음의 선배들이 왜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눈앞의 유익을 쫓았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결말이다. 야곱은 비록 배고프고 약했으나, 결코 팔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내게 맹세하라. 이것을 내게 팔라. 하나님께 맹세하라.”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이는 그가 신앙적으로 얼마나 절박하고도 진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창세기 25장 27-34절은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에서가 당연히 장자이지만 가볍게 팔아넘기는 순간 운명이 바뀌고, 야곱은 부족한 사람이지만 복에 대한 갈망으로 운명을 바꾸어 잡아챈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갈림길에서 에서는‘붉은 죽’에 불과한 세상의 욕구에 굴복했고, 야곱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향해 뛰어들었다. 물론 야곱이 그 과정에서 보여준 수단이 결코 이상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수단의 옳고 그름을 넘어, ‘누가 복에 대해 진정한 열망을 품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가 단지 옛날 가족사나 형제 간의 다툼을 기록한 일화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인생에 직접적인 도전과 교훈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첫째, 운명론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으로 복을 계승하지 않는다는 점은, 아무리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나고 교회에서 오래 생활했어도, 스스로 영적 가치를 붙들지 않으면 의미가 없음을 시사한다. 둘째, 장막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야곱은 들로 나가 사냥을 하기보다는 장막 안을 지키며 가족을 돌보았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지키려는 태도’가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셋째,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지 않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평소에는 조용했을지 몰라도, 장자의 명분을 넘겨받을 때, 그리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챌 때 야곱은 과감히 행동했다. 그 결과 그는 결국 승리자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는 ‘복음을 전수해 주는 영적 부모’ 혹은 ‘지혜자의 도움’이다. 리브가가 없었다면 야곱은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고, 또 자칫 큰 봉변을 당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믿음의 선배와 영적 지도를 받는 과정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복을 붙드는 것은 본인의 몫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에게 어떤 경로로든 복을 허락하시고, 그 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복은 단지 재물이나 세상적 성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언약 가운데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유산이요,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특권이다. 에서처럼 이를 헐값에 팔아치울 수도 있고, 야곱처럼 집요하게 붙들 수도 있다. 누가 보기에 교활해 보일지라도, ‘결단하고 순종하고 지혜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결국 그 사람에게서 빛을 발하게 된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누누이 강조하는 교훈이다. 교회 안에서나 개인적인 영성 생활에서나, 우리는 야곱의 집요함과 결단력을 배워야 한다. 복은 쉽게 얻는 것이 아니며, 그 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인내와 헌신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날마다 죽는” 영적 훈련으로, 세상의 욕망과 헛된 우상 숭배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이처럼 야곱의 이야기 안에는 당시 가족사와 사회문화적 배경 이상의 깊은 신앙적 통찰이 자리 잡고 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던 에서는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거대한 영적 유산을 놓쳤고, 야곱은 그 기회를 붙들어‘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눈앞의 유익 때문에 영적 가치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동시에, 비록 연약하고 부족해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복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자를 들어 쓰신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창세기 25장의 이야기는 결코 옛날 한 가정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곧 메시아의 족보로 이어지며, 결국 인류 구원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이 복음 위에 서 있고, 우리 각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에 동참하게 되었다.

 “장재형 목사”가 설교를 통해 거듭 강조하는 것은, ‘운명론’이 아니라 ‘믿음의 결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라고 하셨지만, 야곱 스스로 그 예언적 말씀을 붙들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언약과 비전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을 붙들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과 결단이 없다면, 그 복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명료한 교훈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날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적용된다.

창세기 25장 27-34절에 기록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일깨운다. 첫째, 배고픔이나 세상적 욕망 등 일시적이고 육적인 만족을 위해 영적인 가치를 팔아버리는 태도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에서는 그 후로 아무리 울부짖어도 잃어버린 복을 되찾지 못했다. 둘째, 야곱처럼 비록 연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복을 놓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자는, 설령 인간적인 약점이 있을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한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도 세상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다양한 갈림길과 선택의 순간이 온다. 그때마다 야곱의 지혜와 결단, 그리고 리브가를 통한 영적 전수와 지도를 떠올리며, 우리가 자칫 ‘붉은 것’에 눈을 빼앗기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장재형 목사’가 역설하듯이, 하나님의 역사는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선택하고 결단할 때 비로소 우리 삶에 실현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에서와 야곱의 서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본질적이며도 실제적인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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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 장재형목사

1. 사도행전의 핵심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역사와 복음이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책으로,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함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실제로 초대교회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여겼던 그룹도 있을 만큼, 이 두 권에 대한 이해는 초기 신앙 공동체의 뿌리와 신앙유산을 살펴보는 핵심 열쇠가 된다. 나아가 신약성경 중에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까지 총 다섯 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역사를 잇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내용을 되새길 수 있을 만큼 숙지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독교 신앙에 필수적이다.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예루살렘을 비롯해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에 퍼져나가고, 마침내 땅끝까지 확산되는 역사가 다채롭게 담겨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바울 사도가 등장하여 복음을 유럽 대륙으로까지 전파해가는 여정이 비중 있게 다뤄진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한 이방인에 대한 복음의 확장, 여러 도시에서의 선교와 박해, 교회 설립, 바울의 옥중 사역 등이 총 28장에 걸쳐 자세히 전개된다.

이처럼 사도행전을 숙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아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 현실 세계 속에서 어떤 역사를 일으키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초기 제자들에게 직접적인 음성 또는 환상, 감동, 막힘 등을 통해 선교의 방향을 정해주셨다. 고린도나 빌립보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는 한편, 비두니아로는 가려 해도 길이 막히는 모습에서, 성령께서는 언제나 무작정 ‘열어주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막으시는 분’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는 현대 신앙인이 자기 인생에서 경험하는 진로나 사역의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을 심도 있게 묵상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도행전 16장에서의 바울 일행의 2차 선교여행 과정이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행 16:6)”,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7)” 등의 말씀은, 바울이 준비하고 계획했던 길이 막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가고자 하는 선교지였으나, 성령께서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결국 바울은 드로아에 이르러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청하는 환상을 보고, 서쪽인 유럽 대륙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이를 통해 그 유명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면서 복음이 서방 세계로 본격 진출하게 된다.

이 장면은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타이밍’이 역사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 깊이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장재형(장다윗) 목사를 비롯한 여러 목회자들 역시 이 원리를 신앙과 교회의 실제 사역에 적용하려 시도해 왔다. 선교와 개척의 방향을 결정할 때, 자신에게 열려 보이는 길이 있더라도, 때로는 성령께서 친히 다른 길을 예비해 두시는 경우가 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많은 선교사가 특정 지역으로 가려 했으나 때로는 질병, 재정 문제, 환경적 문제 등으로 문이 막히고,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신 다른 지역으로 선교의 장이 옮겨간 후에 더 큰 열매가 맺힌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 이는 “내가 원하던 길이 막히면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종말론적 예언과 가르침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부분은 올리벳담화(Olivet Discourse)로 알려져 있다. 마태복음 24-25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에 공통되게 기록된 이 담화는, 예수님께서 감람산(올리벳산)에서 말세에 일어날 징조들을 예언하신 자리에서 비롯되었다. ‘감람산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마 24:3) 제자들의 질문, 즉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는 물음에 답변하시는 형태로 전개된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거짓 messiah’들이 등장하고,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미혹을 일으키며, “나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 경고하신다. 다시 말해 오직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지만, 세상의 끝에 가까울수록 다양한 이단적 가르침이나 대안적 길이 등장하여 혼합주의나 다원주의(Pluralism)를 표방할 것이라 하셨다.

현대 사회의 사상적 흐름인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회의주의에 기반하여, 모든 것은 해체되고 모든 진리는 상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의 절대적 진리 대신 다양한 진리가 공존할 수 있으며, 어느 길을 택하든지 모두 유효하다”는 다원주의가 팽배해진다. 이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라는 사도행전 4장 12절의 선포처럼, 오직 예수 안에 구원이 있음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이다. 올리벳담화에서도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이 혼란에 빠지지만, 진리를 견고히 붙드는 자만이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Only Jesus(오직 예수)’ 신앙을 견지하는 것은 종말론적 신앙의 핵심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과 예수님의 ‘오직 한 길’ 사상을 설파하며, 교회가 자칫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적 사고에 물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인간이 자유와 다양성을 표방하며 만들어낸 수많은 ‘대체 길’들은 결국 하나님 없는 길이 될 위험이 크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별설교(요한복음 14장)와 산상수훈, 올리벳담화를 통해 직접 경고하신“마지막 때의 미혹”에 대응하는 핵심 무기는 오직 말씀과 성령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서 어떻게 복음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전통적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은 ‘성경으로 돌아가자’(Sola Scriptura)는 것이며, 이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진리를 지키고 전파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 본질을 붙드는 태도에 있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개혁교회는 더욱 성경에 가깝게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이유도, 교회가 식어지는 것을 막고, 종말을 대비하는 올바른 신앙 자세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라고 하신 예언이 오늘날 교회 내에 실현될 수 있음을 본다면, 진리 안에 굳게 서는 것이 곧 우리 영혼의 ‘온도’를 지키는 방법이다.

결국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성령이 주도하시는 복음 전파”이며, 이는 올리벳담화 등 예수님의 예언적 말씀과 하나로 이어진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선언은 곧, 복음 전파가 종말론적 시계의 결정적 요소임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건너갔듯, 오늘날 성도들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으므로, 교회는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세상의 탄식을 부지런히 듣고 달려나가야 한다.

특히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피조물이 있다”(롬 8장)를 상기시키며, 전 세계가 복음을 기다리는 마게도냐 사람 같은 절실함을 품고 있다는 점을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원은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이 회복되어야 할 근본 문제로, 온 세상의 모든 ‘고장 난 창조물’을 다시 제대로 작동하게 하려면 설계자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간의 근본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이 길을 알리고 전하는 것이 교회 본연의 사명이다.

2.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난 바울의 마게도냐 환상은 초대교회 선교 역사의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동쪽으로 가고자 애썼으나 길이 막혔을 때, 바울은 서쪽 유럽으로 향한다는 확실한 인도하심을 받았다. 이로 인해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비롯한 사람들과 만나 교회가 세워지고, 바울의 영향력은 그리스를 지나 로마에까지 미치게 된다. 바울이 소아시아 중심의 선교에 머물렀다면, 기독교는 훨씬 더 제한된 구역에만 머물렀을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의 지형을 뒤바꾸며 복음을 서방 세계로 크게 확장시켰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사도행전의 흐름 속에서, 오늘날 미국이 지닌 선교적 위치와 의미를 주목한다. 미국은 한때‘복음주의’(Evangelical) 성향을 강력하게 보유했고, 수많은 선교사를 전 세계로 파송하면서 기독교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으로 인해 미국 교회가 부흥했고, 세계 교회의 선교를 견인하는 중심축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미국 교회가 세속화, 다원주의, 자유주의 사상의 침투로 점차 약화되어 가며, 한때의 영적 활력을 잃는 양상에 놓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예언자적 시선으로 보면, 이는 이사야서에서 경고된 “네 포도주에 물이 섞이고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다”(사 1:22)는 말씀처럼,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릴 때 생기는 영적 퇴조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교회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이사야 6장 13절 “그 중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는 말씀처럼, 포도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아직 남아 있는 그루터기가 있듯이, 여전히 복음의 불씨가 살아 있는 교회들과 지도자들이 존재한다. 장재형 목사는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바울 시대의 부르짖음이 오늘날에도 울려 퍼진다고 주장한다. 곧, 과거에 미국이 전 세계를 향해 선교사를 파송하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교회를 다시 견고하게 세우고, 그 불씨를 되살려서 다시금 온 세상에 복음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한국의 기독교인, 혹은 다른 나라 출신의 복음주의자들이 미국 여러 주(state)에 교회를 개척하고, 새로운 모델을 세우면서 차세대 부흥의 불씨를 피우려 노력하는 흐름이 점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 곳곳에서 고립되어 있던 한인교회나 소수민족 교회가 보다 활발히 움직이고, 다민족 교회로 성장하거나 주류 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관찰된다. 중요한 것은 이 움직임이 단순히 ‘민족적 우월감’이나 ‘문화적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가진 보편적 능력을 다시금 확인하고, 미국 사회 속에서 복음을 회복하고 확산하는 데 목적을 둔다는 점이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사도행전 16장의 말씀은 오늘날 미국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나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지역은 복음이 이미 들어가 정착한 듯 보이지만, 실제론 문화적·사상적 왜곡이나 교리적 타협으로 인해 영적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땅을 회복시키기 위해, 거룩한 씨를 다시 심기 위해,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여 건너와 달라”는 요청이 생긴다. 교회가 이 부름에 민감하게 응답할 때, 성령께서 역사의 방향을 전환시키신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의 교회가 식어지고 있지만, 주님은 계속해서 교회를 새롭게 하심으로써 역사를 이끌어가신다”고 설파한다. 전 세계에서 모인 이민자 공동체나 복음에 다시 눈을 뜬 사람들이, 50개 주(州)에 교회를 개척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실질적으로 선교 지형을 바꾸고, 지역 교회를 통해 ‘네트워크’가 확장될 때, 비로소 새로운 복음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본 후 빠르게 반응했듯이, 교회 공동체도 시대적 소명을 감지하고 신속하게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른바 “미국이 선교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는 선언은 교회 내부에서, 그리고 선교단체나 신학교, 각 교단에서 자주 들려온다. 예전에는 미국이 ‘선교를 보내는’ 국가였다면, 이제는 ‘선교가 필요한’ 국가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국내외 기독교인들이 힘을 모아 “다시 예언하라, 다시 복음을 외치라”는 사명을 붙들게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 10장 11절의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구절이 현대 선교적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두고 “복음이 이미 들어간 곳도 사실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라고 해석한다.

앞서 말한 포스트모더니즘, 다원주의, 자유주의 신학, 세속화 등의 흐름은 미국 교회를 비롯해 전 세계의 교회를 흔들고 있다.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존재하지만, 내적으로는 말씀과 성령의 불이 식고, 복음의 능력이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것이 곧 “포도주에 물이 섞인” 상태이고, 영적 힘을 잃어버린 상황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때일수록“거룩한 씨”로서 주님이 사용하시는 자들이 도드라지게 된다. 크고 소리에 요란한 군중이 아니라, 작은 숫자지만 “십분의 일” 혹은 그 이하의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계속 새 일을 행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성경적 원리와 교회사를 접목시키면서, 진리의 성령이 임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베푸신 사랑을 끊임없이 기억나게 하시고, 우리를 식지 않게 하신다”고 강조한다. 선교사나 목회자, 교회 개척자들은 하나님이 신실하게 보내시는 사람들이다. 종종 열악한 환경에서도 과감히 나아가 교회를 세워왔는데, 이는 바울이 열병에 걸리고, 동역자들이 떠나가며, 길이 막혀도 다시 일어섰던 사도행전적 선교 정신과 맞닿아 있다.

미국 각 주에 교회들을 개척하는 계획도 동일한 맥락이다. 어떤 지역은 기존 교회가 약화되었고, 복음이 동력을 잃어버린 상태일 수 있지만, 그 지역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면, 그곳은 다시 한 번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영적 외침을 발할 수 있다. 이 외침에 응답해 교회 개척과 복음 전파가 이루어질 때,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선교가 확산된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한때 주춤했던 복음주의가 되살아나고, 교회가 “전선으로 나가는” 선교적 엔진 역할을 하게 된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에 단순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 이상으로, ‘종말의 시점’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 말씀 안에는 “세상의 끝이 임박했다면, 너희는 더욱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들어 있다. 한마디로, 복음이 온 세상에 증언되는 과정을 방해하려는 세력도 있을 것이고, 역사적·문화적 난관도 많지만, 이 사명을 완수하려 애쓸 때 비로소 종말이 온다는 희망적 전망이 깔려 있다.

역사적으로도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시기에는 반드시 복음 전파와 파송(선교)이 동반되었다. 18~19세기에 영국이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보낼 때, 국내에서는 감리교나 장로교 등 개신교 교단들이 크게 성장했고, 미국에서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에도 내부 영적 갱신과 함께 해외 선교가 활발했다. 이처럼 교회가 자기 울타리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선교적 마인드를 품을 때, 성령의 역사가 함께 움직이는 사례가 많았다.

장재형 목사 역시 “교회가 식어지면 안 된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며, “선교와 복음 전파에 끊임없이 참여하지 않는 교회는 결국 식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오직 한 길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멈추면, 교회 내부의 영적 열정은 서서히 식어버리고, 세속적 사고방식이 교회를 잠식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경고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곧 ‘영적 활력의 회복’과도 직결된다. 교회가 자꾸 바깥으로 나가고, 새로운 영혼을 품으며, 세상 한가운데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진리를 나눌 때, 교회의 내부 온도 역시 뜨거워진다.

이처럼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는 요한계시록적 사명과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사도행전적 요청이 맞물리면, 현대 기독교의 선교 지형은 놀랍게 변모한다. 지역교회가 막혔던 담을 허물고, 다른 도시나 다른 국가로 건너가서 개척을 돕거나, 함께 예배하고, 다양한 사역을 공유하게 될 때, 포스트모더니즘과 세속화가 만들어낸 무덤 같은 상황을 되살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밤에 환상을 보고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행 16:9-10)는 구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이며, 교회는 일종의 ‘바울 공동체’가 되어, 성령의 인도에 따라 박차고 나아가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선교적 열정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실제로 수많은 교회 개척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지원해 왔다는 점이 자주 회자된다. 여러 지역에서, 혹은 여러 나라에서, 개척 상황에 놓인 교회들에게 필요한 자원과 인력을 파송하고, 선교 전략을 공유하며, 신학교육을 제공하거나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다양하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오직 예수” 복음을 증거하는 공동체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사역의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주도한다”가 아니라“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마치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을 때 예수의 영이 막으셨고, 대신 마게도냐로 향하게 했듯이, 선교사들은 끊임없이 기도하며 길이 막힐 수도 있음을 유념하고, 그때마다 더 열린 길을 찾으며 신속히 움직인다.

물론 이런 대규모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도전이 많다. 재정, 인력, 현지 언어와 문화, 법적 문제 등 숱한 장애물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신 때가 있고, 예비하신 땅이 있다”고 강조하며,그러한 고난의 길을 ‘믿음의 훈련 과정’으로 바라보라고 권면한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아 흩어졌을 때, 그 흩어짐으로 인해 사마리아와 이방 땅에 복음이 더욱 확산된 것처럼, 고난이나 어려움은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지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늘 던진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중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고, 부활 승천 직전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당부하셨다. 이는 곧,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과 방향을 정확히 요약한 말씀이다. 이 방향을 잃어버린 교회나 개인은 결국 세상적 가치관에 치우치고, 영적 생기를 상실하게 된다.

미국이건 아시아건 아프리카건, 어디든지 간에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절박한 외침이 들리는 곳이라면, 교회는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로부터 이어지는 ‘사도행전적 선교 유산’이며, 올리벳담화가 제시하는 ‘예수님의 종말론적 예언’을 완성해 가는 길이기도 하다. 결국 종말은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오기에, 교회는 게으를 틈이 없다. 길이 막히거나 방향을 잃었을 때도, 성령께서 여시는 문을 끝까지 찾고, 거기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현대에 이 사명을 이어받아, 교회 개척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나 선교 전략이 제시되고 있다. 온라인 사역, 다민족 사역, 이민자 사역, 대학 사역 등, 시대와 장소에 따라 맞춤형 방법론도 얼마든지 시도되고 있다. 그럼에도 본질은 하나다. “오직 예수”가 유일한 길이며, 아무리 사상적·문화적 도전이 심해도, 예수 외에는 다른 이름이 없다는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 본질을 사수하지 못하면,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에 덮여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이 본질을 붙든다면, 교회는 반드시 부흥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와 세미나, 집회를 통해 강조해 온 핵심 중 하나도 이것이다. “예수 외에 다른 이름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단호히 싸워야 한다. 그러나 종말론 해석, 전천년설·후천년설·무천년설 같은 논쟁은 교회 내 해석 차이로 인한 것이기에 그 자체로 정죄할 대상이 아니다. 종말론적 방법론은 다양할 수 있으나, 구원론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논리는, 복음의 단일성과 포용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태도다. 전천년이든 후천년이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을 예로 들어 다시 생각해보면, 한때 전 세계에 선교사를 대규모로 파송하던 교회가 이제 침체기에 접어든 지금,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 성도들을 통해 새로운 ‘선교의 바람’을 일으키고 계실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선교의 목적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내 지역교회’다. 이것은 선교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만 일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복음은 어느 한 지역에만 머물지 않았고, 한쪽이 식어지면 다른 쪽을 통해 새 불씨가 옮겨져 활활 타오르곤 했다.

그러므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요청은 결코 옛날 사도행전에나 어울리는 옛말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교회는 ‘이제 내가 건너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날마다 기도하고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막혀 있는 듯 보여도, “성령이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가 있을 수 있으며, 반면 어디선가 간절히 손짓하며 “도우라” 요청하는 환상을 보여주실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바울과 같이 즉시 순종하는 태도다. “밤에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행16:10)라는 구절은, 신앙의 실천이 지체 없이 이뤄져야 함을 가르쳐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와 같은 ‘빠른 순종’을 강조하면서, “상황이나 여건이 완벽하게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면 기회는 지나가버린다. 하나님이 때를 정하셔서 사람과 자원, 재정을 준비해두셨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결단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쌓여, 10년 전에는 아무 기반이 없던 땅에 교회가 세워지고, 20년 전에 전혀 복음이 들어가 있지 않던 지역에 수많은 예배 공동체가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여러 주에서, 한국의 수많은 젊은 사역자들이 교회를 개척해 온 사례도 이를 증명한다. 처음에는 가정집 한 켠에서 5~6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지만, 10년 후에는 수백 명이 예배하는 공동체로 성장한 이야기가 곳곳에 존재한다.

결국,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말씀이 우리 시대에 다시금 부름이 되려면, 교회는 성령의 지도를 인식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곧 종말론적 시계의 핵심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지키고, 이 길을 식지 않게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선교 사명이 있고, 교회가 그 사명에 부응할 때, 역사는 다시 움직인다. 오늘날의 교회가 식어가는 이유는 불법이 성함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교회가 방어적 태도로 나아가기보다, 다시금 “세상 끝까지” 향해 나아가는 공격적 선교 태도를 취해야만 식어진 열정이 불타오르고, 세상이 교회를 통로로 참된 진리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사도행전 16장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명령과 예수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올리벳담화)을 연결해 보면, 교회가 왜 끊임없이 선교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다원주의와 세속화에 맞서 진리를 붙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임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장재형 목사를 키워드로 살펴보면, 그 역시 이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으며, 실제 교회 개척과 선교 프로젝트를 추진함으로써 ‘성령이 이끄시는 길’을 앞서 실천하려 노력해 왔다. 이러한 신앙 여정은 궁극적으로 올리벳담화가 가리키는 ‘세상 끝날’이 올 때까지 교회가 맡아야 할 본분과 책임이라 말할 수 있다. 교회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비로소 종말이 오며, 그 최종적 완성으로 향해 달려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큰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성도는 “예수 외에 다른 이름이 없다”는 복음의 정수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에 기초한 참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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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 장재형목사

1. 빌라도의 관정에 서신 예수님 – 고난의 배경과 인간의 악함

사순절 기간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해한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까지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시는 장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긴 심문과 대화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가진 악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기자는 이 과정을 매우 길고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예수님이 단순히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함만 받은 것이 아니라, 당대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로마의 법정에까지 넘겨져 참혹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읽으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극심한 고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쉽게 위선적 가면을 쓰고 진정한 경건을 잃어버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결국 어느 정도까지 치달을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 또한 이 본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종교적 형식주의와 인간의 간교한 위선이 결국 참된 진리를 가린다는 점을 여러 차례 지적해 왔습니다.

본문은 새벽녘, 예수님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가야바의 법정을 거쳐 빌라도가 있는 관정으로 끌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요 18:28). 어두운 밤이 지나 새벽이 밝아오지만, 예수님께는 결박과 모욕이 끝나지 않은 채로 또 다른 심판의 자리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미 안나스에게서 가야바의 집으로, 그리고 다시 관정으로 끌려오시는 동안 주님은 온갖 모욕과 폭력에 시달리셨을 것입니다. 그 길은 매우 길었고, 대부분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외로움과 고독을 놓치지 않고 기록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그 길에 함께해야 했겠지만,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주님이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순간에 홀로 두지는 않았는지, 우리도 모르게 주님과 다른 길을 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혹은 개인의 신앙생활 안에서, 주님과의 동행이 아닌 독선적 길을 걷고 있지 않은지 늘 경계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고독의 길에 계신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동행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여러 설교와 저술에서 던져 왔습니다. 고난주간이나 사순절기에만 잠시 생각하는 문제가 아니라, 일상의 순간마다 주님께서 겪으신 고독과 고난을 함께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대조는,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유월절 잔치를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관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 18:28). 이것은 매우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태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고 백성을 이끌어야 할 책임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 안에 예수님에 대한 증오와 살인의 마음을 가득 품고 있으면서도,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면 부정해진다’는 이유로 관정에 발을 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유월절이라는 큰 절기를 거룩하게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태도 자체는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문제는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증오와 음모로 죽이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들의 외적인 경건과 종교적 의식은 지키면서,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죄악을 범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유월절 어린 양이시며(고전 5:7), 그분의 살과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는데, 그들은 그 예수님을 이방 권력자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이는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적 사건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들의 악을 정당화하려는 극단적인 이중성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종교적 위선을 두고, 현대 교회와 신자들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자주 언급합니다. “우리도 외적인 의무와 형식만으로 신앙생활을 삼지는 않는가? 겉으로는 거룩한 예배, 깨끗한 의례, 흠없는 절기를 지키면서도, 정작 내면의 죄와 이중성에 대해서는 외면하지 않는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요 18:29 이하)에서 빌라도는 밖으로 나가 유대인들에게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라고 묻습니다. 빌라도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넘어온 죄수가 정말 로마법에 저촉되는 죄를 범했는지 알아야 했기에, 일단 죄목을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8:30)라고 답하는데, 이는 예수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로마법 위반 사항이 있었다고 증명하기보다 “이미 악한 자이니 맡아 달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말에 불과합니다. 빌라도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하자, 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요 18:31)라고 응수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고, 반드시 죽이기 위해 로마의 사형제도인 십자가형을 얻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대목은 참으로 섬뜩하고 비극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종교적 거룩을 내세우는 자들이, 실은 마음 깊은 곳에 예수님을 향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고, ‘죽이는 권한’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자기들이 직접 돌로 쳐 죽일 수도 있었으나(스데반의 사례에서 보듯), 그들은 더 가혹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형으로 예수님을 내몰려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가해진 증오는, 단순히 오해나 충돌을 넘어, 극단적인 폭력과 악의 결정체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32절에서 요한은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이방인의 법정, 즉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심으로써, 구약의 예언과 예수님의 직접적인 예고대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인자가 땅에서 들려야 한다”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고(요3:14, 12:32), 그 ‘들림’은 곧 ‘십자가 위로 들어 올려지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빌라도에게 넘겨지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참혹하고 치욕적인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에 처해지셨고, 이는 유대인들의 교활한 계산과 로마의 잔혹한 사형제도가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해석하며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극악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지만, 동시에 그 십자가가 가장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자리로 역전된다”는 역설을 늘 설교에서 강조해 왔습니다. 인간의 죄가 한없이 깊고 무겁게 펼쳐질수록,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나 인간의 음모로만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극단적 악함조차 당신의 구원 계획을 펼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구약의 요셉 이야기에서처럼(창 50:20), 형들의 악한 의도가 결과적으로는 생명을 살리는 큰 그림 속에서 쓰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도 하나님께서 이미 예정하신 대속의 길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당연히 인간의 악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선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신뢰해야 함을 배웁니다. 빌라도의 심문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동시에 ‘예수님께 과연 죄가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맞닥뜨립니다. 결론은 언제나 “죄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 ‘어떤 방식으로든 죄목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잔인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을 예수님이 받으셨다는 사실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요 18:34)라고 되물으십니다. 이는 ‘정말 너 스스로 알고 싶은 진실인가, 아니면 남이 한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 역시 이 질문에 뚜렷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오히려“내가 유대인이냐”라고 응수합니다(요 18:35). 빌라도로서는 유대 종교의 내부 문제, 즉 메시아 논쟁에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로마법을 위반한 반역자나 폭도인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묻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관심이 없는데, 네가 어떤 죄를 지었길래 이들이 너를 이렇게까지 증오하느냐?”는 의아함이 깔려 있는 질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 66-68). 그리고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답하시어, 사실상 메시야적 권위를 선언하셨습니다. 즉, 문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진실을 듣고 믿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결정해 놓고, 그를 유죄로 만들 구실만 찾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듣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아니라,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자신의 논리만 뒷받침해 줄 증거를 찾는 태도라면, 아무리 확실한 진실이 제시되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경직된 죄성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구절을 해석하며,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이미 선입견과 교만한 태도로 가득 차 있다면, 결코 참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결국 빌라도처럼, 대제사장들처럼,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는 데 급급할 뿐 진리를 놓치고 만다”고 말하곤 합니다.

빌라도 역시 진리를 찾으려 했다기보다는, 정치적 타협을 통해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관례를 이용해 예수님을 석방하려 했고,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 18:38)라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친척이 아니니다”라는 압박을 가해 빌라도를 궁지로 몰았습니다(요 19:12 참조). 결국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 안에 있는 두려움과 세상 권세에 대한 집착을 봅니다. 그는 선을 행할 결심을 잠시 품었으나, 그 결심을 정치적 압박 앞에 포기해 버렸습니다. 인간은 권력과 이익의 문제 앞에서 종종 진리를 저버립니다. 외적인 명분과 정의를 말해도, 실질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할 상황이 닥치면 곧바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불의한 결정을 내리곤 합니다. 빌라도는 ‘나는 결백하다’고 손을 씻었으나(마27:24), 결코 결백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분별하고도 행하지 않은 죄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 사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인간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종교적 열심을 포장 삼아 폭력과 살인을 정당화하려 드는 위선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외적인 거룩, 절기,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고, 심지어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으니 로마가 대신 사형을 집행해 달라”고 말하면서 자기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 했습니다. 겉보기에 종교적으로 ‘깨끗한 절기’를 지키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선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빌라도처럼 진리에 대해 형식적인 관심만 두면서, 결국 자신의 정치적 안전과 권력을 우선시하는 모습입니다. 대제사장들이 악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면, 빌라도는 악의까지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외면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죄의 형태가 다를 뿐, 뿌리는 인간이 가진 죄성이라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와 세속 권력자의 죄, 그 사이에서 언제나 빛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외면당하고 고통받으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고통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고난이었다”고 요약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고, 혹시 빌라도처럼 진리 앞에 머뭇거리며 현실과 타협하고, 대제사장들처럼 거룩이라는 명분으로 잔인한 판단을 하지는 않는지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2.진리의 왕이신 예수님과 우리의 신앙적 응답

본문의 흐름을 계속 따라가 보면,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결국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요 18:37~38).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전에“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묻기 전부터 ‘진리가 자신이며, 그 진리에 속한 자들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의 큰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요 14:6), 진리는 인격적 차원에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진리’라는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거나 무의미하게 여겨졌을지 모릅니다. 그는 정치적ㆍ행정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총독이었을 뿐, 철학자나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은, 참답게 진리를 찾으려는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상대방(예수님)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이 과연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일종의 냉소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진리는 결코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진리는 예수님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그분이 가르치시고 행하신 모든 사역에서 드러납니다. 곧, 진리는 사랑이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희생으로 구체화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으로 곧바로 답을 내리시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유대 종교권력과 로마 정치권력의 야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볼 때는 실패이자 수치요 패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 분명한 승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셨고, 동시에 모든 민족과 세상의 왕이십니다. 하지만 그 왕위에 오르시는 방식은 세상의 권세자들이 추구하는 폭력과 억압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나의 왕국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로마와 유대 지도자들이 계산하는 “권력과 패권”의 방식으로 통치하시는 분이 아님을 뜻합니다.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 이후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새 생명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한 신앙적 응답을 어떻게 보여야 할까요? 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을 토대로, “듣고 순종하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진리는 머리로만 동의하는 관념이 아니라, 우리의 전 인격을 사로잡아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이냐?”를 냉소적으로 던지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 속에서 오직 손익 계산으로만 반응할 수 있습니다. 혹은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처럼, 종교적 열심과 형식은 있지만 실상은 자기 유익을 추구하거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왕이시며 참 진리이십니다. 그분과 연합하는 자는, 이 땅의 잠시 있다 사라질 권력과 쾌락의 유혹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는 생명의 길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서 선고를 받으신 후에, 십자가형을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조롱을 받으셨고,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며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요 19:2~3). 하지만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진정한 왕의 위엄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세속 권세는 무력으로, 재물로, 배타적 폭력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폭력과 죄의 짐을 기꺼이 지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서가 반복해서 증언하는 바,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다가가셨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세상에서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군림하여 예배받는 곳이 아니라,사랑으로 섬기고 거룩함과 정의로 다스리는 곳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와 저술에서 “그리스도의 왕직은 고난과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자주 강조합니다. 왕이신 예수님이 가장 낮은 자리가 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하나님 나라’가 갖는 독특한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끄러움과 실패로 가득 차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 길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완성되는 자리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6절을 통해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아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장면으로 본문은 이어지는데, 그 길에서 주님은 또다시 얼마나 많은 조롱과 고통을 감당하셔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진 고통을 다 겪으시며 이루신 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을 영원히 이기신 왕이 되셨습니다. 이는 구약 시편과 선지서들이 예언했던 ‘의로운 왕’의 실현이며, 동시에 우리가 영화롭게 바라볼 승리의 모습입니다. 그 승리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무력이나 군대 혹은 권세가 아니라, 섬김과 자비, 그리고 자기희생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도전을 주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종교적 형식주의와 내면적 위선 사이의 간극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보여준 모습을 보면,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고자 관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는 모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는 과연 어떤 종교적 의무와 예식을 열심히 지키면서도, 정작 참 사랑과 공의의 실천에는 무감각한 것은 아닌가?”라고 자문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겉으로는 모든 의식을 올바로 지키는 것 같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을 매일 배반하고 있는가?”라는 자기 성찰을 강조합니다. 교회 생활이 오래되고, 봉사나 예배 참여가 익숙해질수록 형식만 남고, 열정과 진실함이 사라지는 위험이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둘째, 진리에 속한 자로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빌라도의 물음 “진리가 무엇이냐?”에 예수님은 답변을 회피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전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참된 왕이심을 드러내셨고,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빌라도가 이 말씀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하고 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결국 진리를 분명하게 인식했음에도 외면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세상의 일과 명예, 생활의 편의성, 혹은 두려움 때문에 진리와 타협하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때론 진리 때문에 희생이 따를 수도 있고, 갈등이 있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명예나 재산을 잃을 수 있다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진리에 속한 자”라면 기꺼이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 용서, 섬김의 길이며, 자기 부인을 통해 얻게 되는 부활의 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진리 순종의 길에 대해 “십자가가 우리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깨뜨려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기 위함”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셋째,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처절한 수난은 그분의 철저한 순종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이었고, 실제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잔혹함을 동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넘겨지시는 동안에도, 침묵을 지키시고 자신의 죄없음을 시종일관 고소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기보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 18:11)라는 자세로 일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보이신 순종은 신자가 본받아야 할 신앙생활의 본질이 됩니다. 우리는 삶의 여러 영역에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손해가 따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의 조롱이나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부활의 영광을 누리셨듯, 우리도 종국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고, 결과적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어린 양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구속 사건이 되었습니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유월절의 역사적 배경에서,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의 사자를 넘어가게 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출 12:13). 그렇게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월절 어린 양의 예표를 완전히 성취하신 분이며, 그분의 피로 우리에게 영적 해방이 주어졌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이 이제 십자가 사건을 통해 확실하게 입증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에 참여함으로써(요 6:53~57), 생명을 얻고 영원한 언약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와 절기는 단지 형태와 의식을 갖추는 데 그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연합, 그분의 보혈을 통한 새로운 삶의 체험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만일 대제사장들과 같이 외적인 거룩함만 좇으면서 실제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신앙의 본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유월절의 완성은 십자가, 그리고 부활에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과 자유를 누리는 길은 철저히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는 데 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결국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에 이르는 긴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과정에서 드러난 인간의 간교함과 잔혹함,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정치적 계산과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외면했고, 유대 지도자들은 종교적 열심과 위선으로 참 생명의 길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거룩한 희생을 가로막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치욕스럽고 참혹한 처형법인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놓고서도 답변을 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 자체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출발이자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우리 죄가 어떤 심판을 받을 만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까지 보장하는 신령한 길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을 향한 찬양과 순종의 마음을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이 진리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혹시 빌라도처럼 당장의 정치적ㆍ사회적 현실 문제 때문에, 혹은 종교 지도자들처럼 외적 거룩에만 갇혀서, 참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말입니다. 진정한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한다면, 우리의 삶도 날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부활 신앙이 바로 교회 공동체의 근간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힘이 된다고 설파합니다. 교회의 사역이 형식적 종교 행사나 조직 운영에만 치중되지 않고, 사랑과 정의, 용서와 화해의 길을 활짝 여는 것은 결국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관정에 서셨다는 것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진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그 고난에 어떻게 동참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영원한 질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죄악되고 간교하다 해도,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통해 그 죄의 본질을 드러내고 해결하십니다.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들이 협잡과 위선으로 일관해도, 결국 예수님을 가로막지 못한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사로잡힐 때 모든 죄와 거짓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이 은혜의 길에 자신을 내어 맡긴 사람은, 더는 빌라도처럼 진리를 외면하거나, 대제사장들처럼 위선에 빠지지 않고, 부활의 능력 속에서 참된 평강과 자유를 맛볼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이 우리에게 던지는 깊은 메시지이며, 장재형목사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설교와 성경강해에서 강조해 온 핵심 진리입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혹독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그러므로 이 복음이야말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소망의 소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요 8:32). 그리고 그 진리는, 빌라도의 관정에 서신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놓치지 않고, 외면하거나 식상해하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되새길 때, 그때야말로 십자가가 새롭게 체험되고, 부활의 기쁨이 우리를 변화시키며, 진리에 속한 자의 삶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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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 장재형목사

아래 글은 장재형(장다윗)목사의 로마서 3장 9-20절 강해 설교를 중심으로 사도 바울은 인간 모두가 죄 아래 있음을 선포하고, 율법과 은혜의 관계, 그리고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가르친다. 특히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인간의 실상이 얼마나 비참한 파멸로 이어지는지 분명히 밝힌다. 본 글은 로마서 3장 9-20절 전체 주해와, 시편·전도서·이사야서·창세기·노아 이야기·야곱의 예언·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 및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 그리고 야고보서 3장 등에 대한 연계 언급을 모두 포함한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구원의 필요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본문에서 강조되는 죄의 실체와 하나님을 떠난 삶의 파멸,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은혜를 선포하면서, 우리가 날마다 죄의 옷을 ‘빨아야’ 함을 역설한다. 


1.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음

로마서 3장 9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인간 모두가 죄 아래 있음을 분명히 가리키는 핵심 구절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1세기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아우를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믿는 자들을 포함한다. 이미 앞선 로마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은 이방인이 어떤 죄 안에 있는지를, 이어 유대인이 어떠한 죄 안에 있는지를 각각 밝히고, 이제 로마 교회 공동체 전체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다”라고 묻는다. 이는 구원받은 공동체, 곧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라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해설하면서,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동시에 “아직” 완전하게 성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늘 자각해야 함을 강조한다. 바울이 5장까지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칭의의 복음을 전한 뒤, 6-7장에서 성화의 과정을 설명하고, 8장에 가서 영화(榮化)의 소망을 언급하는 로마서의 구조 자체가 이를 보여준다. 실제로 7장 끝에서 바울은“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탄식한다. 이는 칭의받은 신자라도 여전히 죄의 찌꺼기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시다. 그 싸움 한가운데에 서 있는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이라면, “우리는 이제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니 죄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쉽게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죄를 경시하는 순간, 인간 안에 잠재된 죄성이 다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붙들기 시작한다”는 점을 단호히 지적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3장 9절 이하의 죄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안심하는 자들에게도 유효한 경고이며 동시에 교훈이다.

바울은 이어서 전도서 7장 20절과 시편 14편·53편, 그리고 예언서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방식은 랍비들이 즐겨 쓰던 ‘카라즈(charaz)’ 기법, 즉 진주 구슬을 실에 꿰어 놓듯 여러 구약 성경구절들을 하나로 엮어 논증을 강화하는 방법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시편과 예언서의 말씀을 연달아 인용하여,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미 너희가 익히 아는 그 말씀으로” 증거한다. 그 대표적 예들이 다음과 같다.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시편 14:1-3, 53:1-3)
  • “선과 악을 분별할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혀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
  •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며, 그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다”
  •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바울이 말하는 이 죄의 목록과 구조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실존을 고발하는데, 장재형목사는 이를 설명할 때 특히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한다. 첫째, 생각과 마음에서 출발하는 죄.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데서 죄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로마서 1장 28절에 등장하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는 구절과 정확히 맞닿는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가분(不可分)’인데, 인간은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살겠습니다. 나를 내버려 두십시오”라 말한다. 그 결말이 곧 ‘파멸과 고생’이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 누가복음 15장 탕자가 아버지 곁을 떠난 사건 모두가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교만에 뿌리를 둔다고 해설한다.

둘째, 생각과 마음에서 시작된 죄는 언어로 나타난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에는 독사의 독이 있으며,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이 썩으니 입에서 썩는 냄새가 나오고, 이것이 바로 인간 전부의 타락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야고보서 3장을 인용하며 혀가 지닌 파괴력을 강조한다.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인생 전체를 불태울 수 있는 불씨와 같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네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내라”고 강력히 말씀하셨는데, 이는 죄의 통로가 되는 눈과 손(행동), 그리고 그 안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혀(말)를 경계하라는 뜻이다.

셋째, 죄는 행동으로 이어져 발걸음을 좌우한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악을 향해 급속도로 달려간다. 장재형목사는 “죄를 짓는 데는 발걸음이 너무나 재빠른데, 선한 일에는 늘 머뭇거린다”는 아이러니를 지적하며, 우리의 발걸음과 행동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날마다 점검하라고 권면한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걸으신 길은 고난과 헌신의 길이었지만,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이익과 쾌락을 위한 길에 훨씬 빠르게 몰두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라는 문장은 하나님 없는 삶의 결론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장재형목사는 “이 길을 계속 고집하면, 인간은 영혼의 파멸과 영원한 고생을 피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덧붙여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을 “두려워함”(경외함)이 없는 것을 죄의 궁극적 증거로 해설한다. 시편 36편 1절을 인용한 바울의 언급, 곧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죄인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는 율법 없이 방종하는 이방인이나, 율법을 가졌으나 외식으로 흐른 유대인이나, 은혜를 알고도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교회 안의 누구든지 공통적으로 해당될 수 있다. 바울은 이처럼 전 인류가 죄 아래 있다고 무겁게 선포한 뒤, 곧바로 율법의 기능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 이 대목은 “결국 율법이 죄를 면제해주는 방패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으니 구원받을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율법을 가졌으면 그 율법의 내용을 전부 지켜야 하는데, 과연 지킬 수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율법의 긍정적 기능”과 “율법이 가진 제한” 둘 다를 분명히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율법은 죄를 억제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유익한 장치이긴 하나,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할 근본 수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의 “입을 막아”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로마서 3장 20절,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는 선포의 골자다.

이처럼 전 인류가 죄 아래 있다는 말씀은 단지 “절망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고개를 드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복음의 서막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이토록 자세히 “죄의 구조”를 밝혀낸 다음 곧장 구원의 길, 곧 ‘은혜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 로마서 3장 21절 이하의 핵심 주제임을 주목하라고 권면한다. 하지만 그 은혜를 참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되며, 날마다 ‘죄의 옷을 빨고(계 22:14 참조),’ 성령과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 이야기도 이를 잘 예표한다. 노아는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의인’이었지만, 구원 후에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는 수치를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함은 아버지를 덮어주었으나 도리어 저주를 받고 말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벗은 모습을 덮어주었는데 왜 저주인가?”라는 의문이 들지만, 그 내막은 함이 아버지를 조롱하거나 일종의 교만으로 바라본 데 있었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죄에 대해 날마다 깨어있지 않으면 노아처럼 또다시 죄를 드러낼 수 있고, 혹은 함처럼 교만 가운데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죄를 다루는 일에는 끝없는 경각심이 필요하다”고 정리한다.

한편,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예언 중 유다를 향한 말씀이 “포도주에 옷을 빨며”라는 표현을 통해 “거룩한 세탁”을 암시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유다는 장차 ‘홀(통치자의 지팡이)’을 쥐게 될 왕의 씨족으로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족보가 이어지는 지파다. 그 예표인 유다의 예언에 “옷을 포도주에 빨고,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매며”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신약에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포도주)로 우리 옷(의)을 깨끗이 씻는 ‘속죄’의 은유로 연결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날마다 예수의 보혈로 자신의 죄의 옷을 빨아야 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미 구원받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교단이나 성향을 비판하며, 오히려 끝까지 자신의 죄를 씻는 데 힘쓰는 자가 계시록 22장14절이 말하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덧붙인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불가분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그 관계가 깨졌다.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 없어도 괜찮다”며 어리석은 길로 가니, 그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게 된다. 눈으로 죄를 보고, 혀로 죄를 내뱉고, 발걸음으로 죄를 향해 달려가는 총체적 타락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장재형목사의 결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보혈을 붙들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이르기 전 단계로, 우리는 먼저“죄인임을 시인하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스스로 곤고함을 고백하고,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한 바로 그 모습이 신앙의 시작점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없으면 복음도 없다. 죄가 죄로 보여야 은혜가 은혜로 보인다는 점이 바로 로마서 3장 9-20절의 논지다.

특히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아버지 집에서 멀어져 자기를 방종하게 내버려두었던 장면,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탕자는 부친과의 관계를 단절했으나, 결국 절망의 끝에서 아버지를 다시 찾았을 때 구원을 경험했다. 반면 부자는 날마다 자신의 자색 옷과 잔치에만 몰두하여, 문밖에서 떨어지는 빵조각으로 연명하던 나사로를 외면했다가 죽음 이후 혀가 타는 고통을 받는 지옥에 던져졌다. 이 부자는 지옥에서 “내 혀에 물 한 방울만 찍어 달라”고 애원하며, 살아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 “너희도 이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사정한다. 이는 마음으로 죄를 선택하고, 혀로 죄를 범하며, 발걸음으로 죄의 길을 향하던 자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혀”의 역할을 짚어낸다. 혀는 선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악을 전파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우리의 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생명을 살리는 “영적 수레”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거짓과 저주로 다른 이를 망가뜨리는 “지옥의 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약 3:6). 부자와 나사로 비유 속 부자가 겪은 지옥 고통의 중심이 바로 “타는 혀의 갈증”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말과 혀가 죄와 구원 사이에서 얼마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지 깊이 숙고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첫 번째 소주제에서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길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향해 마음 문을 열 수 있다.


2. 율법과 은혜, 구원의 길

로마서 3장 19-20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한다. 이는 바울이 이제 본격적으로 “율법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을 선언하는 장면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의 소유자”라는 점을 근거로 자랑스러워했고, 그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을 가졌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데 있다. 장재형목사는“율법이든, 이성이든, 도덕이든, 인간 노력으로는 결코 죄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하며, 바울이 말하는‘은혜’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율법이 하는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죄를 깨닫게 한다(롬 3:20). 둘째, 죄를 억제한다(갈 3:19 참조). 율법은 사람들에게“이것이 죄다”라고 가르치고 경고함으로써 어느 정도 죄를 막아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뿌리 뽑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죄의 뿌리는 “하나님과 단절된 마음”에 있고, 이 마음의 교만과 어두움은 법조항을 지키는“행위”만으로는 근본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을 통해 내가 죄를 알았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오히려 죄가 더욱 왕성해지는 경험이 있었다”고 고백한다(롬 7:8-11). 이 역설은 인간의 부패함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율법이 가진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구원의 길은 어디서 열리는가? 바울은 3장 21절 이하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소개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가(轉嫁)됨으로써,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롬 3:22).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이 로마서의 핵심이자, 복음 전체의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은혜의 본질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공로나 자격이 아니라“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지해 믿음으로 붙잡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누구든 자랑할 수” 있겠지만(롬 3:27 참조),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사실상, 그리고 율법으로서는 죄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 없다는 전제에서, 오직 믿음만이 구원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해설하면서, 이는 인간 쪽에서의‘수용(受容)’이자 ‘신뢰(信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지만, 그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아멘”과 “예” 하는 응답이 필요하다. 이는 곧 복음 전도의 미련함을 통해서, 회개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는 과정을 통해서 역사한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5장 12절 이하, 곧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임했다”라는 바울의 논증이야말로, 이 문제를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단락이라고 덧붙인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복음의 원리가 여기서 확립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구원 이후의 삶이다. 구원받은 신자도 여전히 세상 가운데 살면서 “죄의 세력”과 싸운다. 노아가 홍수 이후 술에 취해 벌거벗은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는 순간 우리는 또 넘어질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6장과 7장에서 구원의 완성과정인 ‘성화’를 말하고, 8장에 가서야 비로소 ‘영화’를 언급한다. 장재형목사는 “칭의가 구원의 출발이라면, 성화는 구원의 여정이며, 영화는 구원의 완성”이라고 요약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

창세기 49장에 언급된 “포도주로 옷을 빤다”는 예언은, 장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속죄의 은혜를 상징하는 동시에, 이미 구원받은 자들도 끊임없이 자신을 ‘빨아야(깨끗케 해야)’ 함을 뜻한다. 계시록 22장 14절에 따르면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죄가 완전히 없는 자들만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예수의 보혈로 날마다 씻기 위해 애쓰는 자들을 가리킨다. 일부 교단이 “구원 이후에는 더 이상 죄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거나 “주기도문 중 ‘죄 용서’ 부분을 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전체가 말하는 구원·성화·회개의 핵심 정신과 어긋난다. 장재형목사는 “신자는 날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죄를 깨달은 자의 정직하고 온전한 태도”임을 역설한다.

더욱이 인간이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다시금 그 길에는 “파멸과 고생”이 기다린다. 노아 이후 인류가 또다시 교만해져 바벨탑을 쌓았듯이, 우리는 언제든지 은혜를 망각하고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럴 때마다“파멸과 고생”이라는 표현이 우리를 향한 경고등처럼 울리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파멸과 고생”이 단지 육신적 고난을 뜻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영적 파멸과 근원적 고통”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영혼이 겪게 되는 가장 심각한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평안(샬롬)을 누릴 수 있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는 절망과 황폐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야고보서 3장에서 혀를 경고하는 말씀도, 구원의 길을 걷는 성도들에게 계속 이어지는 주의를 요청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라는 구절은 혀가 잘못 쓰일 때 얼마나 큰 파괴력을 발휘하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혀가“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일 때에는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밝히는 능력이 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3장에 이어 야고보서 3장을 묵상해보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혀”가 “은혜 아래 있는 인간의 혀”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다고 강조한다. 교회 안에서도 혀로 인해 서로 상처 주고받는 경우가 많고, 때론 언어폭력이 육체적 폭력 못지않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새 언어”, “새 혀”로의 변화를 갈망해야 한다. 이는 율법적 기준을 넘어, “서로 사랑하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끝으로, 로마서 3장 21절 이하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율법 외에 주어진 하나님의 의”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성취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구원론의 핵심을 다시 강조한다. 바울이 2장과 3장에서 죄를 샅샅이 지적한 뒤 굳이 “율법이 아닌 은혜”를 말하는 것은,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며, 설령 외면적인 준수로 어느 정도 율법을 따라도 결국 마음속 죄까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마음의 문제로 끌어들여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도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다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간음”이라 하신 가르침은 모두 “죄의 뿌리가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따라서 구원은 외적 행위를 제한적으로 교정하는 ‘율법’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속죄’와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반드시 “죄인임을 시인하는 영적 회개”가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절규함으로써 자기 무력함을 고백했을 때, 비로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라는 구원의 찬양이 이어진다(롬 7:25). 이것이 신앙 여정에서 반복되는 원리다. 우리는 죄를 계속 발견하고, 다시금 예수께로 돌아가 용서와 능력을 입는다. 이 순환이 거듭되며 우리의 영혼은 점차 성화의 길을 걷는다.

결국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다”는 진술은 하나님 없는 인생이 맞닥뜨리는 운명이며, 동시에 “그 길에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간곡한 초청이기도 하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 속 지옥의 부자는 살았을 때 즐거움을 누렸으나, 죽음 이후에는 물 한 방울조차 허락되지 않는 절망에 갇혔다. 하지만 탕자는 아버지 집에서 멀어졌다가도, 그 길을 끝까지 가지 않고 “내 아버지 집에 돌아가겠다”고 회개함으로써 다시금 회복을 맞이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구체적으로 결론지으며, “지금 당장 돌이킬 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아직 숨 쉬는 동안 우리는 회개하고, 다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설파한다.

따라서 율법과 은혜, 죄와 구원의 길을 이해하는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지만, 그 자체로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한다.
둘째, 율법이 보여주는 죄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길을 찾되,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셋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도, 여전히 죄와의 싸움은 계속되므로 날마다 “포도주에 옷을 빨고(창 49:11 상징),”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혀”와 “발걸음”과 “눈”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애써야 한다.
넷째, 이 모든 과정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우리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겸손한 고백으로 그분 앞에 서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공동체가 이 로마서 3장의 죄론을 대할 때,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일에만 그치지 말고 주변의 영혼들을 살피고, 아픔 가운데 있는 이들을 향해 복음의 말을 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곧 혀를 통해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발걸음을 통해서는 “예수님이 걸으신 희생과 섬김의 자리”로 이동하며, 눈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영적 비전”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내부에 깊이 뿌리내린 죄성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은 그 죄성보다 더욱 크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는 이유이고, 우리도 같은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3장 9-20절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는 선언을 통해, 죄의 본질과 파멸적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다는 것은 곧 죄를 선택하고 하나님을 등진 자의 최후가 어떠한지를 단호히 보여주는 말씀이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반복해서 “구원받은 성도들마저도 ‘나는 나으냐?’라고 물으면 ‘결코 아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날마다 은혜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 그 율법을 온전히 지켜 의를 이룰 사람은 없으므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힘입을 수밖에 없다. 이 은혜가 임해야만, 우리의 마음과 언어와 행동이 새롭게 변하고, 결국 파멸과 고생이 아닌 평강의 길(샬롬)로 접어들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어떠한 지혜나 노력으로도 이룰 수 없는, 오직 성령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길이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이 본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죄만 정죄하기에 급급한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이 먼저 죄인임을 자복하고 회개하는 영적 갱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제자매를 살리고, 세상을 향해 생명의 복음을 제시하는 일, 곧 혀를 통해 말씀을 전하고, 발걸음으로 섬김을 실천하며,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태도가 회복될 때, “파멸과 고생”의 길에서 “평안과 기쁨”의 길로 옮겨지는 구원의 역사가 개인과 공동체 안에 충만해질 것이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3장 9-20절은 인간의 죄 실상과 그 비참한 결말을 낱낱이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난 길에서 돌이켜 은혜의 길로 돌아오라”는 선포를 한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메시지 역시 같은 초청이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죄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한 우리의 상태를 돌아보고,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을 씻자.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죄의 왕 노릇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파멸과 고생이 아닌 영광과 소망의 길’을 달려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본문이 담고 있는 결론이며, 율법과 은혜, 죄와 구원의 길을 이해하는 핵심 관건이다.

예루살렘회의와 갈라디아서 – 장재형목사

Ⅰ. 예루살렘 회의와 초대교회의 구원론

예루살렘 회의는 신약성경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사건으로, 초대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심오한 의미와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다. 특히 ‘어떻게 이방인들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중심에 두고, 율법(특히 할례) 준수의 필수 여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 핵심이었다. 이는 단순한 교리 다툼이 아니라, 교회가 태동하던 시기부터 존재해온 ‘유대적 전통의 연속성과 복음의 보편성 간의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예루살렘 회의는 바울과 베드로, 야고보 같은 중심 인물들이 참여하여, 결국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라는 결론을 도출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보다 확고히 정립해주었다. 이는 훗날 교회 역사에서 종교개혁을 통해 되새겨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정신과도 직접 연결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예루살렘 회의가 제시한 구원론의 핵심적 메시지를 21세기 교회와 선교현장에 그대로 적용하고자 노력하며, 자신의 설교와 저술, 교회 개척 및 신학교 운영 등 다양한 사역에 이를 일관되게 반영하고 있다.

예루살렘 회의가 소집된 직접적인 계기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 지역(갈라디아, 소아시아, 안디옥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겪은 구체적인 갈등이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하는 가운데, 일부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으려면 먼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구약 시대 내내 선민 사상과 함께 강조되었던 ‘할례’는 분명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절대적 표지였다. 모세의 율법이 제시하는 여러 의식 중에서도 특히 할례는 ‘하나님 언약 백성의 소속감’을 확인하는 핵심 제도였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 현장에서는, 이방인에게 유대적 전통을 무조건 강제하는 것은‘복음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일 뿐 아니라, 실제로 복음 전도의 문을 닫아버릴 우려가 있음을 직접 체감했다. 이런 문제의식이 커지자,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모여 공식적으로 이 사안을 논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도행전 15장 6절을 보면,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임에서 “과연 이방인들이 구원받으려면 율법 준수와 할례가 필수적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은 충분히 성취되는가?”라는 쟁점을 두고 격론을 벌였다. 초창기 교회 내부에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적·종교적 습관과 의식은 매우 견고했다. 쉽게 말해, “구약에 기록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경건함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확신이 자연스러웠다. 할례도 그러한 전통의 대표 격이었으므로, “이방인도 진정한 구원에 참여하려면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초기 이방 선교를 적극적으로 이끌던 사도들은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하며, 우리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죄 사함과 새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복음의 본질을 굳게 붙들었다. 이들이 강조한 것은, 율법 그 자체를 무시하거나 파괴하자는 뜻이 아니라, ‘구원의 본질’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이었다. 할례 및 율법 준수는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고, 구약에서 예언된 진정한 ‘의로움’은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바울 서신(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잘 드러나듯, 이 “이신칭의” 사상은 초대교회로 하여금 유대교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온 세상으로 복음을 확장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베드로는 고넬료의 사건(사도행전 10장 참조)을 예로 들었다. 베드로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한 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고,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 이를 확증하셨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어떤 의식적 행위(할례, 정결 예식 등)를 거쳐야만 성령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증언이었다. 고넬료와 그 가족이 할례나 율법 준수를 전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조건 없이 구원으로 초대하신다”는 생생한 증거였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우리가 이방인과 무엇이 다르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을 인간의 전통으로 막을 수 있겠느냐”라고 강력히 호소한다. 그리고 이어진 결정적인 선언이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줄을 믿노라”(행 15:11)는 구절이다. 여기서 ‘우리가’는 유대인 출신의 사도들과 신자들, ‘저희’(또는 ‘그들’)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인식이 분명하게 확립된 것이다.

회의의 결론으로, 야고보(예수님의 형제이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는 이사야서나 아모스, 구약의 여러 예언서에 이미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며, 거기에 이방인들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방인들에게‘네 가지 권면’(우상에게 바친 제물, 피, 목 매어 죽인 것, 음행 등)을 멀리하라는 요청만 전하고, 율법의 짐을 억지로 지우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 ‘네 가지’는 생명과 거룩, 그리고 우상 숭배의 문제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 이방 문화권에서 흔히 행해지던 풍습과 관습 중 ‘도덕적·영적’ 타락의 대표적인 예들을 지목한 것이다. 즉, 구원 자체는 전적으로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지지만, 구원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의 거룩한 윤리적 표준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균형’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예루살렘 회의의 사건을 두고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로 부를 만한 사례라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단순히 ‘갈등’을 봉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의 본질을 분명히 선포했기 때문이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믿는 믿음에 근거한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회의가 남긴 최대의 유산이다. 만약 이 결정이 달랐다면, 기독교는 유대교 내의 소수 분파로 남아 이방 세계로 뻗어나가기 어려웠을 것이고, 복음의 보편성은 크게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을 통해, 교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핵심 기치를 전 역사에 걸쳐 드높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구원론의 보편성’은 훗날 종교개혁의 주요 정신이 된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로 재확인된다. 루터나 칼뱅 등이 로마카톨릭의 공로주의·의식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고, 인간은 전적인 무능력 가운데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역설했을 때, 그들은 본질적으로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미 초대교회가 확인한 구원의 원리에 호소한 셈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주목하며, 예루살렘 회의가 종교개혁 사상, 그리고 21세기 교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온 ‘복음의 근간’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복음의 근간이 흔들릴 경우, 교회는 곧바로 ‘형식주의’나 ‘세속주의’의 덫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회의에서 말하는 ‘네 가지 금지 규정’은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당시 맥락에서는 이방인들이 주로 먹던 음식이 ‘이방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진 고기’거나, ‘잔인한 방식으로 피째 먹는 행위’ 등이 자주 행해졌고, 또 윤리적 타락(성적 방종이나 음행)이 만연해 있었다. 그런 문화를 배경으로 자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들은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말고, 생명을 경시하는 폭력적 행위를 멀리하며, 음행을 금하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결국 이는, 구원이 오직 은혜로 주어지더라도,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거룩과 윤리’를 강조하는 장치다. 장재형 목사는 “구원과 윤리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만약 교회가 ‘오직 은혜’라는 이름 아래 방종을 용인한다면, 초대교회가 예루살렘 회의에서 세운 귀한 원칙을 잃어버리는 셈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가 갖는 가장 근본적 메시지는 두 가지다. 첫째,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와 믿음으로만 완성된다.” 둘째, “구원받은 성도라면 우상 숭배와 음행, 생명을 경시하는 문화와 관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 이 두 기둥이 조화를 이루어야, 교회가 온전한 복음 공동체로 서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복음의 자유와 공동체의 질서를 동시에 세우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자유가 율법주의를 배격하되, 그 자유가 윤리적 책임을 외면하지 않도록 ‘기본적 거룩’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예루살렘 회의의 전통은 이후 바울 서신에서도 동일하게 흐르는데, 특히 갈라디아서에서 그 논리가 더욱 자세히 펼쳐진다.

장재형 목사는 예루살렘 회의의 기록을 중요한 사도행전적 증언으로 삼아, 교회가 어떻게 유대적 배경과 이방적 배경을 아우르며 진정한 ‘에큐메니컬(ecumenical)’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묵상하도록 이끈다. 교회가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 들어가든지, 구원론의 핵심이 ‘오직 은혜와 믿음’에 있고, 윤리와 거룩의 원칙을 지키는 선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특정 교파나 전통이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과 달리, 이방인들에게 ‘할례’에 해당하는 어떤 의무적 예식을 강제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문을 스스로 막아서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예루살렘 회의가 단호히 선언한 “이방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행 15:19)는 말씀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메시지를, 장재형 목사는 반복해서 전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자유와 윤리적 거룩’의 메시지를 갈라디아서가 더욱 구체적으로 풀어낸다고 강조한다.

Ⅱ.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 본 율법과 은혜의 관계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사도 바울의 신학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바울의 서신 중 갈라디아서는 특별히 “할례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이방 교회가 율법의 짐을 다시 지려는 흐름에 대해 강하게 경고한다. 갈라디아 지역 교인들 가운데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어떤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흔들리고 있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 “만일 할례가 구원에 필수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의미해진다”라고 단언한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력하다는 이들”과 만나 복음 진리를 확인받았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학자들은 이를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와 동일한 사건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 야고보, 게바(베드로), 요한이 “바울의 사역에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고 표현한다. 이는 곧,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울이 전파하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 즉 ‘할례 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공적으로 승인했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서 베드로(게바)가 안디옥을 방문했을 때 일어났던 갈등 장면도, 예루살렘 회의 이후 다시금 할례파와 이방인 신자들 간의 긴장감이 얼마나 민감했는지 보여준다. 바울은 이 갈등을 예로 들며,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율법주의적 태도’를 끝까지 배격해야 함을 강조한다.

바울에게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이다. 다만,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스스로 죄를 사해주거나 구원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이 없었더라면 내가 죄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즉, 율법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죄를 인식시키는 ‘거울’이며, 그 죄에 대한 심판과 죽음의 선고를 알려주는 ‘교사’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결국 죄 사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로마서 3장 28절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 선언하고,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도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율법이 구원에 이르는 ‘최종 목적’이 아니라 ‘길잡이’임을 분명히 한다.

결국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려는” 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 사역을 일부 부정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바울은 갈 5: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선언하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촉구한다. 여기서 ‘종의 멍에’란 율법주의를 가리키며, 이는 앞서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가 “우리 조상들도 감당하지 못했던 무거운 멍에”(행 15:10)라고 언급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신자들은 율법 준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의롭게 되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 바울 신학의 정수다.

그렇다고 바울이나 베드로가 율법 자체를 무의미하게 폐기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15장의 결의문에서도 밝히 드러나듯, 이들은 ‘우상 숭배와 음행,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하라’는 명령을 여전히 유효한 윤리적·신앙적 지침으로 제시한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후반부에서 “너희가 자유를 얻었으나,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고 권면하며,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맺는 삶이 진정한 복음의 완성임을 강조한다. 즉, 율법주의라는 무거운 멍에를 벗어버린 자유가 방종으로 치닫지 않도록, 믿음 안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지고, 거룩함을 추구하며, 윤리를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가리켜 “율법주의와 방종 사이에 가로놓인 좁은 길”이라 부른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구원이 마치 인간의 행위에 달린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흐려진다. 반면 은혜만 강조하다 보면, ‘방종’이나 ‘도덕적 해이’에 빠져서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율법을 폐기한 자유”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이 섬기는 자유”이며, 예루살렘 회의는 그 핵심이 “구원은 은혜에 근거하고, 윤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꺼이 순종하는 삶”이라고 분명히 밝힌 사례다.

특히 갈라디아서 1장 8~9절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매우 강경한 어조를 사용한다. 이는 율법주의를 다시 강조하려는 일부 사람들, 즉 “할례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 한 경고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강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복음의 본질이 흐려지는 순간 교회가 ‘종교적 제도’나 ‘형식’에 매몰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력화하는 치명적 사태가 벌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결론과 정확히 맥을 같이한다. 사도행전 15장 10절에서 베드로 역시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지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라고 반문함으로써, 율법이 결국 죄와 사망을 드러내는 역할은 할 수 있어도, 생명으로 이끄는 궁극적 구원 기능은 수행하지 못함을 천명했다.

이처럼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 15장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분기점이며,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명료하게 정리해준다. 결국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고,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라면 일상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와 저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그는 “율법이 악한 것이라고 단정 짓지 말고,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신자라면 율법이 보여주는 윤리적·도덕적 통찰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존중해야 하지만, 동시에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이 구원의 본질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울의 신학적 가르침은 로마서에서도 유사하게 등장한다.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하며, 5장 1절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고 말한다. 이는 갈라디아서와 다르지 않은 메시지다. 로마서가 좀 더 체계적인 신학 논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면, 갈라디아서는 보다 즉각적이고 논쟁적인 어조로 교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요점은 동일하다.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이 아니고서는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은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와 같은 흐름이 이미 결정적 형태로 확립되었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이르러서는 바울의 논리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의 뿌리를 이해하려면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함께 공부해야 하며, 특히 갈라디아서가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을 구체적으로 변증해주는 역할을 한다”라고 설명한다. 예루살렘 회의가 내린 결론은 역사적 사건일 뿐 아니라, 이후 수세기 동안 교회가 붙잡아야 할 교리적 기반이었다. 그리고 이 기반이 종교개혁의 정신을 통해 재발견되어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로 확장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기독교 신앙이 유지되고 성장하는 데 있어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중심축”이라고 표현한다. 이 중심축이 흔들리면, 교회는 결국 율법주의나 세속주의에 휘둘려 복음의 순수성과 능력을 상실하기 쉽다는 것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저주를 받으리라는 바울의 선언은, 오늘날 교회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엄중한 경고다. 율법주의적 발상이나, 반대로 은혜를 방종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극단적 자유방임주의도 결국 ‘다른 복음’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현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장 제일주의’, ‘성공 지향적 프로그램’ 등도 때로는 또 다른 의미의 ‘율법화’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예루살렘 회의가 규정한 “이방인을 괴롭히지 말라”는 원칙이, 현대 교회 안에서는 “교인들에게 인간적 업적이나 제도적 의무를 과도하게 요구하지 말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갈라디아서가 경고하는 “다른 복음”은 곧“외형적 성과나 인간의 자랑을 구원의 증거로 삼으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강력히 제시한 ‘율법과 은혜’의 균형은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과 궤를 함께하며, 이를 놓치면 교회는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이방인에게만이 아니라 이미 믿은 자들에게조차 ‘무거운 멍에’를 씌우게 될 위험이 크다.

Ⅲ. 현대 교회의 적용과 장재형 목사의 사역적 시사점

현대 사회 속에서 교회가 직면하는 문제들은 초대교회 시대와는 또 다른 양상을 띠지만, 근본적으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우리의 실제 삶에 어떤 변화를 요구하는가?”, “교회가 특정 제도나 규범을 강요함으로써 복음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에서 예루살렘 회의와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을 21세기 교회 현장에 적극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세계 각국에서 선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여러 지역 교회를 개척하며, 신학교를 운영하는 일련의 사역들은 모두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토대로 전 세계 다양한 문화와 언어권에 복음을 전하자는 비전에서 비롯된다.

첫째,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되, 본질에서는 타협하지 말고 비본질에서는 유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루살렘 회의가 “할례”나 “율법 준수” 같은 전통적 의식을 이방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대신, 우상 숭배와 음행을 비롯한 최소한의 윤리적 경계를 제시한 것을 보면, 복음 전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론의 본질이 확실히 전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을 통해 얻어진다는 점에서 물러서지 않되, 그 외에 예배 형식, 찬양 스타일, 건축 방식, 문화적 표현 등은 각 지역 교회가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가 각종 선교지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예배 시간이나 진행 방식, 찬양의 언어와 악기 사용 등에서 지역 특성을 존중하도록 권장하는 것도 이 같은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방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예루살렘 회의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둘째, 그는 “율법적 멍에”뿐 아니라 “세속적 방종”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주로 할례와 율법 준수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지만, 오늘날 교회 내부에서는 반대로 “은혜만을 강조하며 윤리적 책임과 거룩을 소홀히 하는 태도”가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가 제시한 ‘네 가지 금지’ 규정, 곧 우상 숭배와 음행, 목 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가르침은 구약적 음식 규정의 단순 반복이 아니라, “생명을 경시하지 말고, 하나님보다 앞서는 우상을 두지 말고, 자신과 타인의 몸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항구적 원리를 담고 있다. 현대에도 우상의 형태가 다양하게 변형되어 존재한다(돈, 권력, 물질주의, 자기중심적 욕망 등), 음행도 여러 디지털 매체와 물질적 풍요 속에서 더 교묘하게 파고든다. 목 매어 죽인 것을 먹는 문제나 피에 관한 규정은, 폭력적이고 잔인한 문화를 거부하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메시지로까지 확장 가능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자유케 하시는 은혜 안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윤리적 테두리”라며, 교회가 죄와 분별 없이 타협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초대교회의 영적 유산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구원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그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방종’을 허락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장재형 목사는 예루살렘 회의가 가져다준 결정적 전환점인 “보편적 선교 정신”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 15장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의 결정문을 가지고 이방 지역을 더욱 자유롭게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만약“이방인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결론이 났다면, 그들의 사역은 훨씬 더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교회가 지리적으로나 인구 통계학적으로 확장되는 것도 크게 제한되었을 것이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복음이 온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데 핵심적인 ‘해방 선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현시대에도 교회가 문화와 인종, 언어와 관습의 장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면, 예루살렘 회의가 보여준 정신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구원은 은혜와 믿음에 달려 있다”는 진리를 확고히 지키되, 비본질적 요소(문화, 예배 형태, 전통 등)에서는 최대한 폭넓은 수용을 통해 ‘모든 사람을 향한 복음’을 실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현대판 “에큐메니컬 정신”의 핵심이며, 교회가 분열과 갈등을 넘어 한몸으로 서기 위한 기본 전제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장재형 목사가 이끄는 여러 선교 네트워크나 교단, 신학교 등은 지역에 따라 예배 언어, 예식 형식, 성찬 방법 등을 다양하게 채택한다. 어떤 곳은 전통적인 예배 순서를 유지하기도 하고, 어떤 곳은 보다 현대적이고 젊은 감각의 예배 형식을 시도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예배와 공동체적 삶이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본질을 선포하는지, 성도들의 삶에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돕는지”라는 기준이다. 즉, 예루살렘 회의가 결정한 원칙대로, ‘네 가지 금지’와 같은 기본 윤리적 표준을 지키며 성령의 역사를 자유롭게 수용한다면, 어떤 문화적 표현 방식을 쓰든지 복음은 진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울러 장재형 목사는 한국교회가 예루살렘 회의 정신에서 배워야 할 점을 자주 언급한다. 한국교회는 급속한 성장과 함께 다양한 교파 분열과 내부 갈등이 일어났으며, 때로는 “우리만 옳다”는 폐쇄적 태도를 취하거나, 반대로 “아무거나 받아들여도 된다”는 식의 무분별한 개방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극단 사이에서, 예루살렘 회의의 “오직 은혜와 믿음, 그러나 거룩과 윤리를 지켜야 한다”는 균형은 큰 교훈을 준다. 한국교회가 과연 복음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문화적·시대적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가? 교인들에게 무거운 율법주의나 성과주의적 기준을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윤리적 규범과 공동체적 책임은 어떻게 세울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초대교회가 이미 보여주었다고 그는 말한다.

장재형 목사의 사역 현장에서는 이와 같은 질문들이 구체적인 프로그램, 교회 운영 원칙, 신학교 커리큘럼 등에 반영된다. 예를 들어, 교회 개척이나 선교사 파송을 할 때,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을 중심 메시지로 삼도록 지침을 준다. 동시에,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되, 성경적 윤리를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운다. 이는 곧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네 가지 금지 규정”을 시대와 문화를 넘어 재적용하려는 노력의 한 형태다. 실제로 많은 선교지에서, 토속 신앙과 혼합된 우상 숭배, 성적 물란, 잔인한 주술 의식 등이 발견되기도 하므로, 해당 관습을 무분별하게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음악, 의복, 식생활 문화 자체를 교회가 획일적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본질은 지키고, 비본질은 인정하는 태도는 곧 예루살렘 회의의 핵심 기조와 동일한 맥락이다.

현대 교회가 각종 매체와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함에 따라, 교회 공동체의 형태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디지털 환경에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왜곡 없이 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루살렘 회의와 갈라디아서가 보여준 “복음의 단순함과 순수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온라인상에서 수많은 정보를 소비하고, 여러 종교·사상들을 접하게 되면, 기독교도 그저 ‘많은 종교 중 하나’ 정도로 인식될 위험이 높다. 이럴 때 교회가 스스로를 어떤 ‘규칙’이나 ‘제도’로 차별화하려 한다면, 그것은 다시 율법주의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반면, “우리 교회는 아무 규범도 없고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라는 식으로 자유를 남용하면, 초대교회가 세웠던 거룩의 기준이 사라져 버린다. 장재형 목사는 이 두 극단을 피하려면, 예루살렘 회의가 남긴 원칙—“은혜로 구원받되, 윤리와 거룩을 지키라”—가 지금도 살아 있음을 교회가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에서 시작되어 갈라디아서, 로마서, 그리고 초대교회 전체로 뻗어간 구원론의 기초는, 2천 년 교회사 속에서 한 번도 약해진 적이 없다. 다만, 역사상 다양한 흐름(제도화, 정치화, 세속화 등)이 교회를 흔들 때마다, 교회는 이 원초적 복음의 힘에 다시금 의지하는 과정을 거쳤다. 종교개혁 시기 루터의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선언은 그 대표적 예이며,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중요한 잣대가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복음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그것이 곧“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 모든 언어, 모든 신분이 하나 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구원의 자유가 육체의 기회로 둔갑할 위험”을 아주 현실적으로 경고한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지적한 대로, 서로 물고 먹고 다투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참된 자유와 사랑을 실천하여,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며 “저들이 서로 사랑함을 보라”라고 감탄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복음의 열매이자 초대교회가 남긴 큰 유산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신학적 기초 위에서 다양한 실천 사역을 전개한다. 예컨대, 미디어 선교 플랫폼을 운영하여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최우선 메시지로 내세운다. 교회의 규모나 재정, 프로그램 성과 등을 내세워 우월성을 과시하려 들지 않도록, 교회 지도자들을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지도한다. 한편, 교회 내부에서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면(예: 지도자의 성적 타락, 재정 비리, 권력 남용 등), “오직 은혜”라는 명분으로 덮어버리지 않고, 예루살렘 회의가 제시한 ‘거룩과 책임’의 원칙에 따라 명확히 징계하고 회복 과정을 밟도록 지도한다. 이는 곧 초대교회가 지향했던 “자유 안에서의 윤리적 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며,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지향하려는 실천 방안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예루살렘 회의(사도행전 15장)는 초대교회가 지켜야 할 구원론의 본질을 선언했고, 갈라디아서는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며 율법주의를 강력히 배격했다. 로마서 역시 바울 신학 전반에 흐르는 “이신칭의”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풀어내어, 구원의 열쇠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임을 재확인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역사적·신학적 유산을 이어가려면, 먼저 율법주의와 세속적 방종 사이의 건전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구원의 문제에서 인간의 업적이나 제도를 앞세워선 안 되지만, 동시에 윤리적 무절제나 방종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 회의가 제시한 “이방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자유 선언과 “우상 숭배, 음행 등을 멀리하라”는 윤리 지침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고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중요한 원리다.

장재형 목사가 일관되게 역설하는 것은, 이 원리가 특정 시대나 문화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회가 어떤 지역에 뿌리내리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선포되어야 하고, 그와 동시에 “거룩과 윤리를 지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만약 교회가 외형적 성장이나 프로그램의 다양성으로 인해 ‘본질’을 흐릿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예루살렘 회의가 초대교회 때부터 지켜온 복음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중심으로 모여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의 영적 연합에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예루살렘 회의가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교회가 한때 “유대교의 분파”로 머물 뻔한 것을 넘어서,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열린 구원을 선언했다는 데 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그 구원론을 신학적으로 확고히 뒷받침함으로써, 율법이 아닌 은혜와 믿음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확립했다. 그리고 이 원리는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이어져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자신의 목회 및 선교사역을 통해 바로 이 사실을 실천하고자 한다. “구원의 본질을 놓치지 말 것, 교회가 윤리와 거룩을 무너뜨리지 말 것,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것.” 이것이 예루살렘 회의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현대 교회가 함께 공유해야 할 사명이라고 그는 말한다.

오늘날 교회가 매년, 혹은 매 시점마다 스스로 “우리는 여전히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원리를 지키고 있는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의 본질이 우리의 사역과 생활에 실현되고 있는가?”를 점검한다면, 복음은 계속해서 힘 있게 확장될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점검 과정에서 “진정한 에큐메니컬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문화적 차이, 교단적 차이, 신학적 스펙트럼은 존재할 수 있으나, 구원론의 기초에서 하나 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교회의 큰 힘이다. 이것은 전 지구적 복음 전파의 원동력이 될 뿐 아니라, 교회 내의 분열과 갈등을 해결하는 핵심 열쇠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과거 한 순간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가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지침서’와 같다.

장재형 목사가 제시하는 신학과 목회적 방향은 이런 모든 논의를 바탕으로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오늘에도 유효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예루살렘 회의가 이미 그 시초를 보여준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종종“예루살렘 회의가 없었다면 갈라디아서도, 로마서도, 그리고 2천 년의 교회사도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는 교회가 율법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막아낸 결정적 전환점이었으며, 세계 선교 역사를 열어젖힌 자유 선언이었다. 그는 이 선언을 계속해서 이어가면서, 교회가 제도나 형식에 갇히지 않고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도록 돕고자 힘쓰고 있다. 이로써 “인종, 문화, 언어, 성별, 사회적 신분 등 모든 구분을 넘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누리는” 보편적 복음이 실현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 장재형 목사의 사역 전반에 흐르는 주된 메시지다.

무엇보다도, 그가 말하는 복음의 보편성은 “구원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교회는 그 문지기가 되어선 안 된다”는 강력한 신학적 선언이다. 이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행 15:19)고 했던 정신과 정확히 일치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오히려 문턱을 높여놓고, 여러 의식을 거쳐야만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초대교회가 거부했던 율법주의의 재등장”이라고 진단한다. 교회는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하며, 그 대신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면서도 윤리와 거룩을 함께 붙들도록 권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초대교회의 생동감과 성령의 역사가 21세기 교회에도 계속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처럼 예루살렘 회의, 갈라디아서, 그리고 장재형 목사가 구현하고자 하는 현대 교회의 모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고리’로 연결된다. 구원론의 본질(오직 은혜와 믿음), 율법과 은혜의 관계, 그리고 현대 교회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방향성(보편적 선교와 거룩한 공동체)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위치한다. 이는 교회사가 증언하는 바와도 일치하며,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종교개혁, 그리고 21세기 에큐메니컬 운동까지 이어지는 장구한 흐름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단순히 지식 차원이 아니라 실제 목회 현장과 선교 무대에서 몸소 실행하려 애쓰고 있으며, 그것이 그가 “장다윗 목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지며 여러 공동체와 신학교를 개척, 운영해온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가 보여준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사도행전 15장의 결론대로, 구원은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고, 그 구원을 받은 이들은 삶에서 우상 숭배와 음행, 생명 경시에 해당하는 모든 악습을 버리고 거룩을 지키며 서로를 돌보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갈라디아서가 선포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는 어떤 문화나 시대, 국경의 장벽을 뛰어넘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보고, 모든 크리스천이 이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이 사명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예루살렘 회의가 이미 우리에게 선례를 보여주었기에,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며 세상 속에서 복음의 빛을 증거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은혜’를 변함없이 증언하며, 교회가 “유대인과 헬라인, 이방인과 모든 민족이 함께 어우러지는” 진정한 에큐메니컬 공동체가 되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뱀의 유혹과 영적 전쟁 – 장재형목사

Ⅰ.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그리고 3장에 드러나는 인간의 타락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이야기가 모든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임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창 1:1의 말씀은 우주 만물의 기원과 존재의 이유, 나아가 인간의 근본적 목적과 운명을 통찰하는 기초가 된다고 한다. 이 창조의 드라마에서 하나님은 혼돈 속에 빛을 선포하시고, 그 빛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구분되면서 하늘(Heavens)과 땅(Earth)이 질서 있게 형성되었다. 창조의 모든 장면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영하기에, 맨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나온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이 가진 존귀한 정체성(하나님의 형상)과 특별한 사명(만물을 다스리며 창조 세계를 아름답게 돌보는 역할)을 설파한다. 동시에 창세기 1장과 2장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누릴 수 있었던 완벽한 상태를 펼쳐 보여주는데,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시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는 금령을 주심으로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책임을 동시에 부여하셨다고 해석한다. 곧,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리모트 콘트롤하려 하지 않으셨다.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셨기에, 스스로 말씀을 지키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설계하셨다”라고 말한다. 문제는 그 인간이 하늘의 뜻에 따라 자유를 바르게 행사하기보다 타락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이 그 전환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장 1절에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먼저, 그에 따르면 뱀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점이 아주 분명히 선언되어 있다. 이는 이원론적 시각—태초부터 선한 신(하나님)과 악한 신(사탄)이 나란히 존재했다는—이 성경적으로는 틀렸음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악의 원천이 하나님과 대등한 어떤 악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 중에서 타락해버린 사탄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곧, 뱀은 본래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이었으나, 간교한 지혜를 활용해 반역함으로 사탄이 되었고,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창세기 3장 속 뱀의 모습이 단지 사람이 아는 그 생물학적 뱀이 아니라, 예언서와 신약성경에서 ‘마귀’ 혹은 ‘사탄’이라 칭해지는 영적 존재를 상징한다고 본다. 그래서 “큰 용 곧 옛 뱀 사탄 마귀”라고 계시록 12장 9절에서 선언되는 대목이 창세기 3장의 뱀과 일치한다고 가르친다.

이어 그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질서에 반역한 사탄이 어떻게 내쫓겼는지 계시록 12장을 통해 설명한다. 사탄은 머리에 일곱 왕관을 쓴 큰 붉은 용으로 묘사되며, 그 꼬리로 하늘 별들의 삼분의 일을 끌어내릴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 ‘큰 용’은 결국 하늘에서 추방되어 땅으로 내어쫓겼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고, 그때 함께 쫓겨난 자들이 이 세상 통치자들(Rulers)과 권세자들(Powers) 위에 포진하여 세상 풍조를 물들이고, 사람들을 눈멀게 하며 혼미케 한다고 에베소서 6장을 근거로 설명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영적 배후 세력의 존재가 성경적 세계관의 중요한 열쇠라 한다. 인간이 여러 악을 행하는 진짜 이유는 단순히 육체적 본성이나 환경에 있지 않고, 근원적으로 사탄에게 미혹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책임이 사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통해, 즉 ‘네 탓이요,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요’라는 고백으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점도 동시에 강조한다. “하나님이 뱀을 만드셨는데 왜 이런 타락이 일어났느냐”고 질문할 때, 바로 이 자유의지를 가진 영적 존재가 반역했다는 답을 제시하며,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의 간계이지만, 그 사탄의 유혹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우리의 몫”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그는 야고보서 1장 13절의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을 들어, 신앙인이라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떠넘기는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수많은 고통과 시험 뒤에는 간교한 뱀, 즉 사탄이 은밀히 작동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동시에 인간 자신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음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의 죄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려고 “우리가 결국 더 큰 은혜를 누리도록 타락을 허용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렇게 말하면 모든 책임을 피조물(인간)에서 창조주(하나님)에게 전가하는 결과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 “선악과 금령”을 주신 하나님은 전혀 악하지 않으시며, 인간과 함께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셨으나,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자발적으로 굴복함으로 죄가 들어왔다는 해석이 타당하다고 그는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이 선하게 만드신 그 천사적 존재가 타락하여 사탄, 마귀, 뱀, 용이 되었다는 점을 여러 본문으로 확증한다. 그는 이 점이 구원론의 핵심과도 연결된다고 본다. 곧, 인간은 본디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살았으나 사탄에게 미혹되었고, 그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사망이 왔다. 창세기 3장 이후 온 우주는 이 타락의 영향 아래 신음하고 있으며(롬8:22 참조),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이 선포된다는 메시지가 성경 전체를 관통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창세기 3장의 뱀 사건은 단순히 ‘옛날에 벌어진 그때 거기(there then)의 비극’이 아니라, ‘지금 여기(here now) 우리에게 매일 일어나는 실제적이고도 생생한 유혹’임을 체감하는 계기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예수가 누구인지, 또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나와 맞서 싸우는 사탄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그가 종종 예화로 드는 것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 안에 깃든 어둠의 영이 쑥 빠져나가는 순간을 목격하는 일화이다. 장재형목사는 대학가에서 성경을 가르치다가, 마지못해 끌려온 어느 학생에게 말씀이 선포될 때 그 사람 안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나가는 것을 영적으로 감지한 적이 있다고 간증한다. “내가 선포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세가 말씀과 함께 전해질 때 사탄이 더는 그 영혼을 붙들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사탄은 인간의 지정의를 타락시키고,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다양한 ‘간교한 지혜’를 동원한다. 그러나 그 배후를 알아보면 “사탄의 실체는 그리 거창하지 않으며, 예수의 이름에 벌벌 떠는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계시록 12장 9절의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라는 말씀을 특별히 강조하며, 신자들은 이미 이긴 전쟁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고 담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담대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바울이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명령하신 대로 신앙의 무장을 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말씀),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로 깨어 있지 않으면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왜 하와가 먼저 사탄의 유혹을 받았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본문(창세기 2장과 3장)을 깊이 살펴보면 아담이 하나님께 직접 금령을 받았고, 하와는 아담을 통해 전해 들은 2차적 지식이었다고 해석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성경의 서술 순서상의 논리적 접근이지만, 그는“말씀을 직접 받고 깊이 깨달은 자가 그렇지 못한 자보다 더 유혹에 강할 수 있다. 하와가 연약했다는 것은 단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깊은 ‘체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 따라서 현대 신앙인도 직접적으로 성경을 듣고, 읽고, 깊이 깨닫고, 그것을 삶에서 반복 적용하며 영적 전쟁의 무장을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결론은, 뱀의 간교함이든 인간의 연약함이든, 이 모든 것을 내어쫓고 이길 수 있는 열쇠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있다. 사탄은 인간을 파멸로 끌고 가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들의 권세(요1:12)를 누릴 수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주어지는 약속이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는 원시복음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마귀가 노리는 것은 신자들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따라서 그는 이 거룩한 전투의 최종 승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그 승리에 동참할 것을 힘 있게 선포하며, 성도들에게 “내 탓이요”의 회개와 “예수의 권세와 능력”을 지님으로 사탄에게 결박당하지 말라고 강권한다.

Ⅱ. 주기도문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가 지닌 의미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과정을 설교할 때, 주기도문의 한 구절과 깊이 연결지어 본다. 즉,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이, 곧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사탄의 전략과 그 대응책을 직접적으로 다룬 핵심 기도라는 것이다. 그는 이 기도문에 담긴 구조를 여러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가장 심플하게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하는 전반부, 그리고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죄 용서, 시험에서 구해 달라는 간구가 이어지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그중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인간이 뱀의 간교함에 무너졌던 창세기 3장과 바로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험이 우리를 찾아올 때, 우리는 쉽게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말하듯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신다. 사탄이 역사하는 것이고, 우리의 욕심이 잉태되어 죄를 낳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주기도문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는, 신자라 할지라도 스스로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제발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사탄의 발판이 되지 않도록, 내 마음을 지켜주소서”라고 부르짖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전략적 기도”라 부른다. 사탄이 모든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역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우리는 기도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도의 내용이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에 집약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요청이, 그저 ‘악행을 저지르지 않게 해 달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악한 자 사탄으로부터 나를 구출해 달라’는 영적 전쟁의 호소임을 역설한다. “인간은 홀로 서 있을 때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면 사탄이 항복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의 광인 안에 들어있던 군대 귀신의 요청을 들으셨을 때,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사정하는 마귀들의 비참하고도 굴욕적인 모습이 사탄의 실체다”라고 그는 말한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는 결국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의 보혈과 권세 안에 나를 두셔서, 사탄이 마음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달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해석된다고 장재형목사는 가르친다.

그는 교회 안에서도 이 주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외우는 수준에서 머무르지 말고, 실제 영적전쟁의 언어로 읽고 적용하라고 권면한다. 설교 중에는 “주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를 할 때, ‘시험’과 ‘악’이 결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 “정말 하나님이 너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라며 교묘히 질문을 던지듯, 우리 일상에서도 마귀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들거나, 스스로 ‘내 중심적 판단’을 하게끔 부추긴다. 결국 “하나님은 이거 하지 말라셨지? 그런데 그분이 정말 너를 위한 거야, 아니면 뭔가 숨긴 게 있어?”라고 속삭이면서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전략’을 펼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이 가장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타락의 문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는 데서 열린다.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 거기서 죄가 잉태된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하와의 대답이다. 하와는 뱀의 질문에, “우리는 동산의 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라고 응수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까지 주셨는지에 대해 창세기 2장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 점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하와가 말씀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데서 오는 문제, 혹은 그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이미 생긴 불신이 가중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한 예를 들어, 사람이 말씀을 부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사탄이 그 틈새를 노리고 자신만의 거짓말을 슬쩍 끼워넣어 혼란케 하거나 하나님을 더욱 왜곡된 분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쉽다는 사실을 경고한다. 주기도문을 붙들고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생각, 자기 해석을 절대화하다가 스스로를 죄의 함정에 빠뜨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주기도문이라는 거대한 방패막을 통해, 매일매일 영적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에 삼키우지 않도록 늘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설파한다. 그것이 사탄의 간계를 꿰뚫고 승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야고보서 1장 2절 이하도 함께 인용하며,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이‘사탄의 시험’을 하나님이 쓰셔서 결국 우리를 단련하신다는 차원의 선한 열매를 언급하지만, 그럼에도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전제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사탄은 그 연약함을 공격해온다는 사실이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이 그래서 절실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의지력이나 도덕성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겨보겠다고 나서면 반드시 실패한다. 오직 예수 안에서의 기도가 열쇠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승리를 기억하며, 우리가 그 완성된 승리를 내 것으로 붙들기 원한다고 날마다 간구해야 한다”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리고 이 기도가 단지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교회와 공동체, 더 나아가 국가와 지도자를 위해서도 드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탄은 통치자나 권세자에게 달라붙어 더 큰 악을 만들어내기 쉽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6장 12절이 말하듯,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 우리의 씨름이라고 할 때, 주기도문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는 현시대 정치와 문화, 사회와 경제 전반에 드리운 영적 어둠에 대한 기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이 부분을 통해, 예수의 권세로 사탄이 결박되어야 하는 영역이 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도 넓게 존재함을 밝히며, 신자는 각자의 삶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Ⅲ. 영적전쟁과 하나님의 사랑

장재형목사는 결론적으로 창세기 1~2장을 통해 본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 그리고 3장에 드러나는 인간의 타락 과정을 ‘영적전쟁의 실제적 서막’으로 규정한다. 에덴동산이라는 완벽한 조건에서 첫사람이 사탄의 유혹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우리 또한 얼마든지 죄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임을 경고해 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이것이 단순히 절망적 메시지로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이미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복음을 예언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예표이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근본적으로 박살 내심으로써, 인간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그가 “영적전쟁”을 말할 때, 흔히 들려오는 극단적 신비주의나 미신적 접근과는 다른 “말씀 중심의 전쟁”을 강조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는 종종 “경건의 모양만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태도를 반대하며, 동시에 “영적전쟁을 내세워 검증되지 않은 신비 체험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상 위주로 몰아가는 풍조”도 경계한다고 말한다. 대신 성경이 말하는 영적전쟁은, “뱀의 머리를 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만연한 마귀의 거짓말을 몰아내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구체적으로는, 말씀이 선포될 때 악한 영이 물러가고, 회개와 죄사함이 선포될 때 사탄의 고소가 힘을 잃으며, 예배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어둠이 떠나가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게 영적전쟁이라고 설파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아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사랑이 식으면 믿음이 식고, 믿음이 식으면 사탄이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이 커지기에, 인간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았음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주 요한복음 1장 12절을 인용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원래 인간에게 허락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사탄에게 빼앗긴 상태였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현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아담이 잃어버린 자리, 하나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로서의 존엄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영적전쟁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이미 내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이 지식이 없으면, 사람들은 여전히 사탄에게 끌려다니며 어둠 속에서 밤낮 불안해하고 갈급해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선포하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에 결국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핵심 가르침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밤에 잠이 오지 않고 괴롭다면, 어둠의 영이 그대를 괴롭히고 있는지 성찰해 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밤은 곧 대낮이 될 수 있다”라고 한다. 빛 되신 예수께서 함께하시면 사탄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체험한 수많은 치유와 회복의 역사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 간증한다. 가령, 귀가 들리지 않던 누군가가 성령의 임재 가운데 ‘어둠의 영’이 떠나고 귀가 뚫리는 역사를 경험했다는 일화도 예로 든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자랑하듯 말하기보다,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말씀의 권세”라는 점을 강조한다. 초대교회가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았던 것처럼, 지금도 믿는 자에게 동일한 능력이 임하며 그것이 바로 영적전쟁에서의 성도의 무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남용해선 안 된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그럼 우리는 아무 고난도 없어야 하고, 언제나 즉각적 기적으로 문제를 해결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탄이 공격해오고, 이 땅에 죄의 흔적과 상처가 가득한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소망 중에 인내’할 수 있는 이유가 예수의 승리가 우리와 함께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의 “피조물도 고대하는 바가 있으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 피조물 전체가 함께 탄식하며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구절을 들어, 창조 세계가 여전히 죄의 영향 아래 신음하지만, 동시에 구원 완성의 소망을 버리지 않는 이중적 상태에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새로워지고, 사탄은 완전히 무저갱에 던져져 끝없이 결박될 것이며,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송할 것이라는 희망이 그가 전하는 궁극적 종말론이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부터 시작하여, 마귀와 사탄으로 일컬어지는 영적 실체가 어떻게 인간을 속이고 넘어뜨리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주기도문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설교한다. 그의 설교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사상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도, 성령의 능력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내 탓이요”를 외치며 회개하고, 예수를 진정으로 영접하면, “영적전쟁의 승리는 이미 확정된 사실”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진리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자유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원한 안식과 기쁨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의 말미마다, 성도들이 단지 지적 동의나 호기심 충족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 삶 속에서 사탄의 대가리를 치는 ‘실제적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고 촉구한다. 예컨대 집이나 생활공간에서 십자가를 세우고, 봉헌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의 권세를 선포하는 것, 가정예배를 드리며 영적 질서를 세우는 것, 말씀을 매일 묵상함으로 어둠이 틈타지 못하도록 하는 것 등이 구체적 방법으로 제시된다. 그는 “마귀들이 예수께 애원하듯, 결국은 예수 이름 앞에서 쫓겨나는 것이 사탄의 숙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짝하여 살면, 사탄은 계속 우리 안에 머문다. 그러므로 영적전쟁은 실제적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결국 그의 설교 전반의 흐름은 “인간의 타락, 죄의 책임, 사탄의 간교함, 예수의 승리, 그리고 신자의 영적전쟁”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보고 있다. 창세기 3장의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사건이야말로 구약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거대한 내러티브, 곧 ‘하나님 나라 vs. 사탄의 왕국’의 충돌에서 중요한 모멘트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이 거룩한 전투에 임하는 신자의 핵심 무기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이 기도를 매일매일 드릴 때, 사탄은 우리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고 달려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 머리를 박살 낼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곧, “피조물인 사탄이 결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으며, 이미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패배가 확정된 존재”라는 신학적 확신 위에 세워진다. 동시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자”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장재형목사가 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바라주는 궁극적 메시지는 그래서 “인간의 타락이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사탄이란 언제든 우리를 밀어뜨릴 수 있는 영적 원수라는 사실을 직면하자. 그러나 두려워 말고, 예수 이름으로 담대히 대적하라. 이미 예수께서 승리하셨기에 우리도 그 승리를 누릴 수 있다.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기도하고, 마음을 지키며, ‘내 탓이요’라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과 회복을 허락하신다”라는 요약으로 귀결된다. 그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머물 때, “사탄의 시험을 당해도 견디며, 오히려 영적으로 더욱 강건해지고, 예수의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는 신앙적 도약을 약속한다.

장재형목사가 창세기 3장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설교는, 사랑의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관계, 그리고 사탄의 기원과 활동을 면밀히 다루면서,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지는 구원의 역사와 영적전쟁의 의미를 매우 실감나게 제시한다. 그가 강조하는 점은 언제나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동시에 예수 안에서 부름받아 구원받은 자이니, 사탄에 맞서 싸울 영적 무장을 갖추고 매일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이 결코 우리 힘이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1~2장의 창조와 3장의 타락, 그리고 주기도문과 야고보서·계시록 등 신구약 전반의 말씀을 종합하여, 교회가 이 땅에서 맞서야 할 진정한 적이 “공중권세를 잡은 악의 영들”임을 밝혀주며, 동시에 신자들에게“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것이니 담대하라”고 권면한다. 이 권면 속에서, 그는 결코 무모한 전쟁론이나 막연한 두려움으로 몰아가지 않으며, 오히려 “말씀과 기도로 무장된 자에게는 어둠이 틈탈 자리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 선언 뒤에는 늘 “내가 누군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예수의 권세를 유업으로 물려받았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라는 확신이 자리해 있으며, 그것이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복음의 정수이자 영적전쟁의 실제라 할 수 있다.

주기도문과 유혹 극복 – 장재형(장다윗)목사

주기도문의 다섯 가지 핵심 기도 주제 중 특히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부분을 중심으로, 성경 본문(마6장, 창3장, 마4장, 고전14장, 약1장 등)에 나타난 ‘시험(유혹, 시련, 고난, 테스트)’과 그 의미를 다룬 내용들을 3개의 소주제로만 분류한 글이다. 여기에는 장재형목사가 설교나 가르침에서 강조해온 주제들이 포괄적으로 녹아 있으며, 그가 언급한 고전14장의 다섯 마디 말, 야고보서의 시험(유혹) 교훈, 창세기3장의 아담과 마태복음4장의 예수님 간의 대조, 그리고 주기도문의 핵심 구조 등을 함께 통합적으로 서술한다.

Ⅰ. 하나님 이름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의 우선성

장재형목사는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두 가지 커다란 대전제가 기도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늘 강조해왔다. 즉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임하고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하신 말씀 또한 이 흐름에 연결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팔복선언(마5:3~12) 중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간절히 사모하는 영적 갈망을 가지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의’는 단순히 세상적 정의나 도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상태’, 곧 하나님의 나라와도 직접 연결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향해 우리가 목말라해야 하며, 그 나라가 임하도록 진심으로 구해야 한다. 주기도문은 바로 그 기도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제시한다. 모든 기도 가운데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늘 설교에서 반복해서 강조한다. 왜냐하면 신앙 생활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을 채우거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구하는 태도야말로 기도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우리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성경 전체를 꿰뚫는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란, 어떤 물리적 공간이나 정치적 왕국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임하는 곳, 즉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이 실제적으로 실현되는 공간이자 상태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라고 선포하셨을 때, 그 ‘천국’(하나님 나라)은 오직 죽은 뒤에만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 땅에도 임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했다. 따라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현장의 모든 상황과 마음의 모든 영역 속에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려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며, 교회 공동체에도 주님이 왕이 되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교육·선교·구제·다양한 사회 활동 등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성도 개인만의 경건 생활을 넘어 교회 공동체와 세상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도록 기도하고 행동하라는 초청이다. 그렇게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자각할 때, 기도는 곧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구하는 우선적 행위가 된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이 우선순위가 확립되어 있을 때에야 다음 단계의 기도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주기도문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를 앞머리에 두고, 이어서 우리 인간이 구해야 할 세 가지 기도 제목을 연결한다. 즉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뒤따른다. 장재형목사는 주기도문을 크게 다섯 가지 기도(또는 기도 제목)로 구분하기도 하고, 더 세밀하게 여섯·일곱 가지로 나눠보기도 하지만, 핵심은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 그리고 그 뒤 ‘일용할 양식·용서·시험’이라는 흐름으로 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하나님, 아버지이신 당신의 이름이 높여지길 원합니다. 이 땅 가운데 당신의 나라가 임하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는 고백이다. 교회를 포함한 온 세상이 하나님 나라로 변화되길 간구하는 마음을 품을 때, 그다음에 우리의 일상적 필요나 관계의 회복, 영적 전투에서의 승리를 구하는 기도가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순서가 뒤바뀌거나,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구하는 것 없이 곧바로 우리의 필요만을 아뢰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주기도문의 본래 의도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의 통치를 구하는 기도의 태도야말로, 모든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대전제’이다. 이를 잊지 않고 붙들며, 교회와 가정, 그리고 개인의 일상에까지 항상 “주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이름이 온 세상에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그 기도 자체가 큰 능력이 된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를 힘주어 강조하며, 교회가‘죽은 교회, 우상을 숭배하는 교회’가 되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교회가 되려면, 그 기도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설파해 왔다.

Ⅱ. 일용할 양식과 용서의 기도, 인간관계의 회복

주기도문에서 앞선 두 가지 큰 전제(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에 이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가 계속된다. 장재형목사는 설교나 강연에서 이 대목들을 연결하여, 이것이 인간 삶의 ‘현재와 과거’를 다루는 중요한 영역임을 설명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오늘 우리의 ‘현재’를 의미하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는 과거의 상처와 문제,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난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소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먼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살펴보자. 이 기도는 우리의 일상적 필요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선 먹고 입고 마시는 물질적 요소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전혀 무시하지 않으시고,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심을 믿고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산상수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1)고 하신 말씀은, 결코 우리의 물질적 필요가 하찮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라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것이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고 설명한다. 단순히 물리적 양식이나 경제적 수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양식, 곧 말씀도 포함되며, 진정한 만족과 쉼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실 때(마4장)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다”는 구절이 바로 이와 연결된다.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건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적·영적 필요를 아시며 채우시도록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앙의 고백이다. 이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눈을 들어, 매일의 필요를 구하고 감사함으로 그것을 받는 훈련이기도 하다.

이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용서의 기도는 과거에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보여준다. 과거의 잘못, 상처, 갈등이 현재의 관계와 미래에까지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자유를 얻고 상대방을 자유케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가셨다(요1:29)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없이 크신 사랑으로 우리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서로에게 연약함이 있음을 인정하고, 용서하고, 풀어주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용서를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길”이라고 자주 말한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이라면, 이제 형제와 이웃의 관계도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만 용서받았다’고 기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그 사랑을 흘려보내면서 다른 사람과도 화해하는 일에 주력해야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신 바이며, “네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라는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다.

용서는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며, 때로는 깊은 상처를 동반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길이고, 우리가 세상과 구별된 존재로 살 수 있는 핵심 동력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죄와 허물을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게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친 누군가를 위한 용서는 당연하다. 어렵지만 나아가야 할 길이다.” 이런 맥락에서,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고, 그다음에 우리의 기본적 필요와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한 기도를 드릴 것’을 촉구한다. 이 순서를 분명히 하고, 또 끈질기게 기도하며 실천할 때, 교회와 사회 안에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문화가 싹트게 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하는 대목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고, 제대로 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늘 돌아보라는 의미다. 하나님과 화해된 사람이 이웃과도 화해의 관계를 맺어야 신앙이 온전히 자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혹은 개인의 삶 속에서 누구를 미워하거나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용서를 통해 그 묶임을 풀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이행해야 할 과제임을 주기도문은 분명히 보여준다.

이처럼 일용할 양식과 용서의 기도를 순서대로 붙잡고 나아갈 때, 우리는 일상에서 필요한 공급뿐 아니라 마음의 얽힘과 관계의 상처에서도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물질적 필요와 영적 필요, 그리고 인간관계의 깨어짐과 화해 등을 모두 하나님께 의탁하며 전진할 때, 우리의 지난날과 현재가 모두 주님 안에서 회복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기도 훈련의 핵심이자 실천의 열쇠”라고 강조하며, 교회는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모두가 방언과 성령의 역사도 체험하되,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말씀을 깨닫고 서로를 용서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방언과 예언 등은 중요한 은사들이지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전13장)고 사도 바울이 말했듯, 참된 기독교 신앙은 사랑과 용서로 나타난다. 그래서 “다섯 마디 말로 깨달음 있게 가르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전14:19)는 경고가 우리에게 필요하며, 그 다섯 마디가 곧 주기도문에 응축된 다섯 가지 기도의 골자와도 연결된다는 점을 장재형목사는 거듭 강조해 왔다.

Ⅲ.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유혹과 시련을 이기는 기도

주기도문의 마지막 기도 주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미래와 관련된 문제로 해석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기도의 의미를 설명할 때, “시험”이 갖는 여러 차원의 뉘앙스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어에는 시험을 뜻하는 여러 단어가 있는데, trial(시련), test(테스트), suffering(고난), 그리고 temptation(유혹) 등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시험’은 어떤 맥락에서는 시련과 연단의 의미로, 또 어떤 맥락에서는 마귀의 유혹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주기도문의 “시험”은 바로 후자의 의미, 즉 “유혹(temptation)”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야고보서 1장 13절 이하에서 사도 야고보는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이 대목은 시험(유혹)의 근원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이며, 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약1:14~15)고 선언한다. 즉, 인간이 죄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떠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뱀(사탄)은 에덴동산에서 “결코 죽지 않는다, 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거짓말로 하와와 아담을 유혹했고, 그들은 결국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 유혹은 겉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창3:6)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미 주어져 있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 뱀(마귀)의 거짓말과 사람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 후에 책임을 회피한다.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자(창3:9), 아담은 하와를 탓하면서 “하나님이 만들어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그 여자 때문에 내가 실과를 먹었습니다”(창3:12)라고 변명한다. 심지어는 결국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논리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한편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시되, 모두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죄 없이 승리하신다. 이 두 이야기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으로 대비되며, 시험에 대한 교훈을 선명히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우리도 늘 유혹이 닥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문장을 포함한 이유다. 또한 이미 유혹에 빠져버렸다면, 그다음 문장인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우리의 마지막 호소가 된다. “하나님, 제가 이미 시험에 걸려들었다면, 지금이라도 저를 끄집어내어 주시옵소서. 여기서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진지한 회개와 구원의 기도이자, 죄의 덫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야고보서 1장 전체를 보면, ‘시련(trial)’과 ‘유혹(temptation)’이 구별되어 동시에 제시된다. 야고보서 1장 24절은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시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연단과 고난으로서, 이를 통해 믿음이 단련되고 인내를 이루어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성경 여기저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를 더 강건하게 세우기 위해 허락하시는 ‘시련과 테스트’가 나온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을 시험(테스트)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순종으로 믿음이 확증되었고(창22:12), 욥기에서도 욥은 극심한 시련과 고난을 겪었으나 결국 믿음이 더욱 정금같이 단련되었다. 이런 ‘시련’은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이며, 우리를 강하게 하고 소망에 이르게 한다(롬5:34).

그러나 야고보서 1장 13~15절이 말하는 건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 아니라, 악마의 ‘유혹’이다. 그 유혹은 전적으로 우리의 욕심과 결탁하여 죄를 낳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만든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받는다’ 하지 말라”고 단언한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통해 우리를 넘어뜨리시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가 그 시험을 이기고, 혹은 이미 넘어졌다면 다시 일어나 구원받도록 손을 내미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주기도문의 시험 기도”가 가진 가장 심오한 메시지라고 설명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 달라’는 간구이자, 혹시라도 넘어졌다면 ‘악에서 구출해 달라’는 은혜의 호소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시험과 유혹을 이기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담처럼 자신의 실수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거나, 하나님이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다고 잘못 판단하면 절대로 해결이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죄로 망가진 우리를 도로 살리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사탄은 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널 버렸어, 혹은 네가 이 지경이 된 건 하나님의 불공평한 탓이야’라고 왜곡된 음성을 심어주려 한다. 만약 그런 거짓말을 믿게 되면, 시험에서 헤어나오기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 곧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날마다 기도할 때 이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하나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혹시 제가 넘어졌다면, 그 악에서 건져내어 주옵소서.” 이토록 간구하는 기도를 날마다 드리는 것이 영적 전쟁에서의 필수 무장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와 성도들이 방언과 예언, 여러 은사를 사모하되, 가장 근본적으로 이런 말씀의 원리를 아는 ‘깨달음 있는 다섯 마디 말’을 늘 품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이 터져 나오고 다양한 은사가 활발했으나, 혼란과 시기가 일어나 서로를 비판하거나 교만해지는 문제도 있었다(고전14장 참조).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섯 마디를 말하여 남을 가르치겠다”라고 했다. 그 다섯 마디가 무엇인지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장재형목사는 이를 주기도문의 다섯 가지 기도와도 연결해 설교하면서, 교회가 은사 중심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 중심’으로 체계를 잡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아무리 뜨거운 영적 체험이 있다 해도,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나라를 구하는 기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용서를 나누는 기도, 유혹을 이기고 악에서 구원받기 원하는 기도”가 없는 신앙이라면 그 뿌리가 흔들리기 쉽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이 부분은, 우리의 미래와 맞닥뜨린 영적 전투의 핵심을 다루고 있으며, 회개와 구원을 동시에 호소하는 절절한 기도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시험을 통과하기 바라시며, 시험에 실패하여 넘어졌다면 다시 돌아오길 원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신앙생활의 큰 여정이라고 역설한다. “사람이 넘어졌을 때, 마귀는 우리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하고, 스스로를 정죄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도록 몰아간다. 하지만 성령은 ‘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회개하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우리가 ‘시험’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이라면 기쁘게 받으며 인내로 견디면 되겠지만, 마귀가 가져다주는 ‘유혹’에 빠졌다면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간구하는 회개와 겸손한 부르짖음을 통해 열린다.

창세기3장과 마태복음4장을 신중히 대비하면, 유혹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제압되며,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명확히 볼 수 있다. 첫째 아담이 ‘누가 시켰다’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며 숨을 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라고 응수하시며 말씀을 근거로 사탄을 물리치셨다. 예수님께서 사탄을 대적하실 때 언제나 꺼내셨던 무기가 바로 성경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었으니, 너는 이렇게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분명히 선언하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유혹을 이기는 길이‘하나님의 말씀을 단단히 붙드는 것’임을 증언한다. 말씀을 모르거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으면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결국 주기도문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들은 이 다섯 가지다. 그것을 늘 기억하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다섯 마디 기도”라고 부르며, 고전14장에서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 마디 깨달은 말이 낫다”는 바울의 말과 연결하여, “주기도문에 응축된 이 다섯 가지가 진정한 깨달음의 말이다”라고 설파한다. 그렇게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나라’를 먼저 구하고, ‘일용할 양식과 용서’를 구하며, 끝으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간청하는 삶을 살 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지고, 이웃과 화해하게 되며,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 승리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

이 길은 쉽지 않으며, 날마다 반복되는 영적 싸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미 모범을 보이셨고, 야고보서 등 여러 신약 말씀을 통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것이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고 약속하신 바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련(trial)은 우리를 연단하여 더 성숙하게 하지만, 사탄이 주는 유혹(temptation)은 우리를 죄에 빠뜨려 죽이려 한다. 그러므로 시험에 대해 늘 경계하며 깨워 기도해야 하고, 넘어졌다면 낙심하지 말고 즉시 돌아서야 한다. 주님은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면 내가 너희를 고치고 새롭게 하겠다”는 메시지를 언제나 주시며, 이는 주기도문에서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청원으로 직접 이어진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서 어린아이부터 장년까지 모두가 일찍이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길 바라고, 성령의 능력을 생생하게 경험하길 원한다고 밝히면서도,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임을 거듭 지적한다. 영적 체험은 매우 귀한 것이지만, 말씀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그 체험이 교만으로 흐르거나, 시험에 들기 쉬운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 교육을 통해, “하나님 말씀으로 충분히 무장되고, 주기도문에 담긴 핵심 기도를 날마다 실제 생활에서 적용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결론적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영적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말씀이다. 이 기도는 한편으로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귀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라는 적극적 간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미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되었다면, “저를 악의 소굴에서 건져내어 주옵소서”라는 부르짖음의 기도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험과 시련, 유혹과 고난, 테스트와 연단이라는 여러 양면이 얽혀 있는 복합적 단어인 “시험”을, 야고보서는 절묘하게 구분하여 해설해준다. 우리는 날마다 주기도문을 통해 이 사실을 떠올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매달리며,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로 유혹을 물리치고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부름으로 시작되는 기도가, 최종적으로 “시험에서 이기게 해주옵소서”라는 청원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신앙 여정의 전형이라 설명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구하고, 하루하루 먹고사는 현실과 대인관계의 복잡함을 그분께 맡기며 용서를 실천하다가, 결국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간구하는 것이 신앙의 정수라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성도가 집중해야 하며, 교회는 이 다섯 가지 기도 제목을 중심축으로 삼아 서로를 세워주고 위로하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주기도문의 핵심이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친히 가르쳐주신 위대한 ‘기도 교육’의 완성이다.

결국, 주기도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해야 할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지침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청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간단해 보이는 구조 속에 엄청난 영적 비밀이 담겨 있다고 역설한다. 교회와 성도들은 주기도문을 외우는 데 그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다섯 마디 기도의 실제 내용을 각자의 일상에서 날마다 묵상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다섯 마디 깨달은 말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그 깨달음 있는 다섯 마디가 곧 주기도문의 핵심 요소와 일맥상통함을 인식해야 한다.

이처럼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나라를 구하는 대전제의 기도”에서 시작해, “일용할 양식과 용서의 기도”를 거쳐,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탄원으로 마무리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흐름이 곧 인간의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믿음의 과정이라고 풀이한다. 과거의 상처와 죄는 용서와 회개로 해결되고, 현재의 필요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미래의 위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극복한다. 그 모든 시간축을 관통하는 주체는 곧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로서 왕이신 아버지의 나라와 영광을 우선시해야 한다.

결국 시험이란, 시련(trial)이 되어 믿음을 연단하는 경우도 있고, 유혹(temptation)이 되어 죄로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은 후자와는 무관하시며, 우리를 넘어뜨리는 악한 존재는 마귀다. 따라서 “하나님이 왜 이러시는 거지?”라는 원망과 오해에 빠지지 않고, 뱀(사탄)의 거짓 유혹을 분별하며, 혹 넘어진다 해도 다시 일어나 ‘악에서 건져달라’고 간청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성도들은 점점 더 강건해지고, 주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약1:12). 이것이 바로 시험(유혹)과 시련을 바라보는 성경적 관점이며, 주기도문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고자 하신 목표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교회와 신학교육, 선교 사역, 다양한 목회 현장에서 가르침과 실천을 지속해 왔다. 목회자로서 성도들이 단순히 “시험을 없애주세요”라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함”과 “이미 넘어졌을 땐 즉시 회개하고 악에서 건져달라 호소해야 함”을 명확히 인식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고, 교회가 생명력을 유지하게 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주기도문 안에 담긴 핵심 기도들을 가슴 깊이 새기고 날마다 실천하는 개인과 공동체는, 분명히 어떤 환난이 와도 하나님 안에서 다시 일어나 끝까지 인내하며 승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거듭 전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주기도문 다섯 가지 기도의 핵심을 중심으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구절에 관한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을 정리해보았다. 이를 오직 3개의 소주제로만 분류하여(하나님의 영광과 나라, 일용할 양식과 용서, 시험과 유혹) 살펴봄으로써, 주기도문 전체가 지닌 구조와 흐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경배할 때, 이미 하나님은 그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음을 열어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되, 과거의 죄와 오늘의 필요,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위험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는 결코 소극적 탄원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자녀의 담대한 고백”이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알고,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며, 기도로써 의지할 때, 어떤 유혹과 시험도 결국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는 진리야말로, 주기도문이 전하는 복된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