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예루살렘 회의와 초대교회의 구원론
예루살렘 회의는 신약성경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사건으로, 초대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심오한 의미와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다. 특히 ‘어떻게 이방인들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중심에 두고, 율법(특히 할례) 준수의 필수 여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 핵심이었다. 이는 단순한 교리 다툼이 아니라, 교회가 태동하던 시기부터 존재해온 ‘유대적 전통의 연속성과 복음의 보편성 간의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예루살렘 회의는 바울과 베드로, 야고보 같은 중심 인물들이 참여하여, 결국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라는 결론을 도출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보다 확고히 정립해주었다. 이는 훗날 교회 역사에서 종교개혁을 통해 되새겨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정신과도 직접 연결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예루살렘 회의가 제시한 구원론의 핵심적 메시지를 21세기 교회와 선교현장에 그대로 적용하고자 노력하며, 자신의 설교와 저술, 교회 개척 및 신학교 운영 등 다양한 사역에 이를 일관되게 반영하고 있다.
예루살렘 회의가 소집된 직접적인 계기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 지역(갈라디아, 소아시아, 안디옥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겪은 구체적인 갈등이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하는 가운데, 일부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으려면 먼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구약 시대 내내 선민 사상과 함께 강조되었던 ‘할례’는 분명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절대적 표지였다. 모세의 율법이 제시하는 여러 의식 중에서도 특히 할례는 ‘하나님 언약 백성의 소속감’을 확인하는 핵심 제도였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 현장에서는, 이방인에게 유대적 전통을 무조건 강제하는 것은‘복음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일 뿐 아니라, 실제로 복음 전도의 문을 닫아버릴 우려가 있음을 직접 체감했다. 이런 문제의식이 커지자,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모여 공식적으로 이 사안을 논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도행전 15장 6절을 보면,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임에서 “과연 이방인들이 구원받으려면 율법 준수와 할례가 필수적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은 충분히 성취되는가?”라는 쟁점을 두고 격론을 벌였다. 초창기 교회 내부에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적·종교적 습관과 의식은 매우 견고했다. 쉽게 말해, “구약에 기록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경건함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확신이 자연스러웠다. 할례도 그러한 전통의 대표 격이었으므로, “이방인도 진정한 구원에 참여하려면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초기 이방 선교를 적극적으로 이끌던 사도들은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하며, 우리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죄 사함과 새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복음의 본질을 굳게 붙들었다. 이들이 강조한 것은, 율법 그 자체를 무시하거나 파괴하자는 뜻이 아니라, ‘구원의 본질’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이었다. 할례 및 율법 준수는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고, 구약에서 예언된 진정한 ‘의로움’은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바울 서신(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잘 드러나듯, 이 “이신칭의” 사상은 초대교회로 하여금 유대교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온 세상으로 복음을 확장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베드로는 고넬료의 사건(사도행전 10장 참조)을 예로 들었다. 베드로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한 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고,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 이를 확증하셨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어떤 의식적 행위(할례, 정결 예식 등)를 거쳐야만 성령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증언이었다. 고넬료와 그 가족이 할례나 율법 준수를 전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조건 없이 구원으로 초대하신다”는 생생한 증거였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우리가 이방인과 무엇이 다르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을 인간의 전통으로 막을 수 있겠느냐”라고 강력히 호소한다. 그리고 이어진 결정적인 선언이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줄을 믿노라”(행 15:11)는 구절이다. 여기서 ‘우리가’는 유대인 출신의 사도들과 신자들, ‘저희’(또는 ‘그들’)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인식이 분명하게 확립된 것이다.
회의의 결론으로, 야고보(예수님의 형제이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는 이사야서나 아모스, 구약의 여러 예언서에 이미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며, 거기에 이방인들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방인들에게‘네 가지 권면’(우상에게 바친 제물, 피, 목 매어 죽인 것, 음행 등)을 멀리하라는 요청만 전하고, 율법의 짐을 억지로 지우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 ‘네 가지’는 생명과 거룩, 그리고 우상 숭배의 문제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 이방 문화권에서 흔히 행해지던 풍습과 관습 중 ‘도덕적·영적’ 타락의 대표적인 예들을 지목한 것이다. 즉, 구원 자체는 전적으로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지지만, 구원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의 거룩한 윤리적 표준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균형’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예루살렘 회의의 사건을 두고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로 부를 만한 사례라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단순히 ‘갈등’을 봉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의 본질을 분명히 선포했기 때문이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믿는 믿음에 근거한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회의가 남긴 최대의 유산이다. 만약 이 결정이 달랐다면, 기독교는 유대교 내의 소수 분파로 남아 이방 세계로 뻗어나가기 어려웠을 것이고, 복음의 보편성은 크게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을 통해, 교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핵심 기치를 전 역사에 걸쳐 드높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구원론의 보편성’은 훗날 종교개혁의 주요 정신이 된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로 재확인된다. 루터나 칼뱅 등이 로마카톨릭의 공로주의·의식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고, 인간은 전적인 무능력 가운데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역설했을 때, 그들은 본질적으로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미 초대교회가 확인한 구원의 원리에 호소한 셈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주목하며, 예루살렘 회의가 종교개혁 사상, 그리고 21세기 교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온 ‘복음의 근간’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복음의 근간이 흔들릴 경우, 교회는 곧바로 ‘형식주의’나 ‘세속주의’의 덫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회의에서 말하는 ‘네 가지 금지 규정’은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당시 맥락에서는 이방인들이 주로 먹던 음식이 ‘이방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진 고기’거나, ‘잔인한 방식으로 피째 먹는 행위’ 등이 자주 행해졌고, 또 윤리적 타락(성적 방종이나 음행)이 만연해 있었다. 그런 문화를 배경으로 자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들은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말고, 생명을 경시하는 폭력적 행위를 멀리하며, 음행을 금하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결국 이는, 구원이 오직 은혜로 주어지더라도,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거룩과 윤리’를 강조하는 장치다. 장재형 목사는 “구원과 윤리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만약 교회가 ‘오직 은혜’라는 이름 아래 방종을 용인한다면, 초대교회가 예루살렘 회의에서 세운 귀한 원칙을 잃어버리는 셈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가 갖는 가장 근본적 메시지는 두 가지다. 첫째,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와 믿음으로만 완성된다.” 둘째, “구원받은 성도라면 우상 숭배와 음행, 생명을 경시하는 문화와 관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 이 두 기둥이 조화를 이루어야, 교회가 온전한 복음 공동체로 서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복음의 자유와 공동체의 질서를 동시에 세우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자유가 율법주의를 배격하되, 그 자유가 윤리적 책임을 외면하지 않도록 ‘기본적 거룩’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예루살렘 회의의 전통은 이후 바울 서신에서도 동일하게 흐르는데, 특히 갈라디아서에서 그 논리가 더욱 자세히 펼쳐진다.
장재형 목사는 예루살렘 회의의 기록을 중요한 사도행전적 증언으로 삼아, 교회가 어떻게 유대적 배경과 이방적 배경을 아우르며 진정한 ‘에큐메니컬(ecumenical)’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묵상하도록 이끈다. 교회가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 들어가든지, 구원론의 핵심이 ‘오직 은혜와 믿음’에 있고, 윤리와 거룩의 원칙을 지키는 선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특정 교파나 전통이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과 달리, 이방인들에게 ‘할례’에 해당하는 어떤 의무적 예식을 강제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문을 스스로 막아서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예루살렘 회의가 단호히 선언한 “이방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행 15:19)는 말씀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메시지를, 장재형 목사는 반복해서 전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자유와 윤리적 거룩’의 메시지를 갈라디아서가 더욱 구체적으로 풀어낸다고 강조한다.
Ⅱ.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 본 율법과 은혜의 관계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사도 바울의 신학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바울의 서신 중 갈라디아서는 특별히 “할례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이방 교회가 율법의 짐을 다시 지려는 흐름에 대해 강하게 경고한다. 갈라디아 지역 교인들 가운데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어떤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흔들리고 있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 “만일 할례가 구원에 필수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의미해진다”라고 단언한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력하다는 이들”과 만나 복음 진리를 확인받았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학자들은 이를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와 동일한 사건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 야고보, 게바(베드로), 요한이 “바울의 사역에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고 표현한다. 이는 곧,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울이 전파하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 즉 ‘할례 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공적으로 승인했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서 베드로(게바)가 안디옥을 방문했을 때 일어났던 갈등 장면도, 예루살렘 회의 이후 다시금 할례파와 이방인 신자들 간의 긴장감이 얼마나 민감했는지 보여준다. 바울은 이 갈등을 예로 들며,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율법주의적 태도’를 끝까지 배격해야 함을 강조한다.
바울에게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이다. 다만,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스스로 죄를 사해주거나 구원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이 없었더라면 내가 죄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즉, 율법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죄를 인식시키는 ‘거울’이며, 그 죄에 대한 심판과 죽음의 선고를 알려주는 ‘교사’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결국 죄 사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로마서 3장 28절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 선언하고,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도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율법이 구원에 이르는 ‘최종 목적’이 아니라 ‘길잡이’임을 분명히 한다.
결국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려는” 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 사역을 일부 부정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바울은 갈 5: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선언하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촉구한다. 여기서 ‘종의 멍에’란 율법주의를 가리키며, 이는 앞서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가 “우리 조상들도 감당하지 못했던 무거운 멍에”(행 15:10)라고 언급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신자들은 율법 준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의롭게 되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 바울 신학의 정수다.
그렇다고 바울이나 베드로가 율법 자체를 무의미하게 폐기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15장의 결의문에서도 밝히 드러나듯, 이들은 ‘우상 숭배와 음행,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하라’는 명령을 여전히 유효한 윤리적·신앙적 지침으로 제시한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후반부에서 “너희가 자유를 얻었으나,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고 권면하며,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맺는 삶이 진정한 복음의 완성임을 강조한다. 즉, 율법주의라는 무거운 멍에를 벗어버린 자유가 방종으로 치닫지 않도록, 믿음 안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지고, 거룩함을 추구하며, 윤리를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가리켜 “율법주의와 방종 사이에 가로놓인 좁은 길”이라 부른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구원이 마치 인간의 행위에 달린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흐려진다. 반면 은혜만 강조하다 보면, ‘방종’이나 ‘도덕적 해이’에 빠져서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율법을 폐기한 자유”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이 섬기는 자유”이며, 예루살렘 회의는 그 핵심이 “구원은 은혜에 근거하고, 윤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꺼이 순종하는 삶”이라고 분명히 밝힌 사례다.
특히 갈라디아서 1장 8~9절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매우 강경한 어조를 사용한다. 이는 율법주의를 다시 강조하려는 일부 사람들, 즉 “할례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 한 경고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강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복음의 본질이 흐려지는 순간 교회가 ‘종교적 제도’나 ‘형식’에 매몰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력화하는 치명적 사태가 벌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결론과 정확히 맥을 같이한다. 사도행전 15장 10절에서 베드로 역시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지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라고 반문함으로써, 율법이 결국 죄와 사망을 드러내는 역할은 할 수 있어도, 생명으로 이끄는 궁극적 구원 기능은 수행하지 못함을 천명했다.
이처럼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 15장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분기점이며,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명료하게 정리해준다. 결국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고,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라면 일상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와 저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그는 “율법이 악한 것이라고 단정 짓지 말고,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신자라면 율법이 보여주는 윤리적·도덕적 통찰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존중해야 하지만, 동시에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이 구원의 본질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울의 신학적 가르침은 로마서에서도 유사하게 등장한다.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하며, 5장 1절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고 말한다. 이는 갈라디아서와 다르지 않은 메시지다. 로마서가 좀 더 체계적인 신학 논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면, 갈라디아서는 보다 즉각적이고 논쟁적인 어조로 교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요점은 동일하다.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이 아니고서는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은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와 같은 흐름이 이미 결정적 형태로 확립되었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이르러서는 바울의 논리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의 뿌리를 이해하려면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함께 공부해야 하며, 특히 갈라디아서가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을 구체적으로 변증해주는 역할을 한다”라고 설명한다. 예루살렘 회의가 내린 결론은 역사적 사건일 뿐 아니라, 이후 수세기 동안 교회가 붙잡아야 할 교리적 기반이었다. 그리고 이 기반이 종교개혁의 정신을 통해 재발견되어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로 확장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기독교 신앙이 유지되고 성장하는 데 있어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중심축”이라고 표현한다. 이 중심축이 흔들리면, 교회는 결국 율법주의나 세속주의에 휘둘려 복음의 순수성과 능력을 상실하기 쉽다는 것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저주를 받으리라는 바울의 선언은, 오늘날 교회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엄중한 경고다. 율법주의적 발상이나, 반대로 은혜를 방종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극단적 자유방임주의도 결국 ‘다른 복음’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현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장 제일주의’, ‘성공 지향적 프로그램’ 등도 때로는 또 다른 의미의 ‘율법화’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예루살렘 회의가 규정한 “이방인을 괴롭히지 말라”는 원칙이, 현대 교회 안에서는 “교인들에게 인간적 업적이나 제도적 의무를 과도하게 요구하지 말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갈라디아서가 경고하는 “다른 복음”은 곧“외형적 성과나 인간의 자랑을 구원의 증거로 삼으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강력히 제시한 ‘율법과 은혜’의 균형은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과 궤를 함께하며, 이를 놓치면 교회는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이방인에게만이 아니라 이미 믿은 자들에게조차 ‘무거운 멍에’를 씌우게 될 위험이 크다.
Ⅲ. 현대 교회의 적용과 장재형 목사의 사역적 시사점
현대 사회 속에서 교회가 직면하는 문제들은 초대교회 시대와는 또 다른 양상을 띠지만, 근본적으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우리의 실제 삶에 어떤 변화를 요구하는가?”, “교회가 특정 제도나 규범을 강요함으로써 복음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에서 예루살렘 회의와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을 21세기 교회 현장에 적극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세계 각국에서 선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여러 지역 교회를 개척하며, 신학교를 운영하는 일련의 사역들은 모두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토대로 전 세계 다양한 문화와 언어권에 복음을 전하자는 비전에서 비롯된다.
첫째,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되, 본질에서는 타협하지 말고 비본질에서는 유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루살렘 회의가 “할례”나 “율법 준수” 같은 전통적 의식을 이방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대신, 우상 숭배와 음행을 비롯한 최소한의 윤리적 경계를 제시한 것을 보면, 복음 전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론의 본질이 확실히 전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을 통해 얻어진다는 점에서 물러서지 않되, 그 외에 예배 형식, 찬양 스타일, 건축 방식, 문화적 표현 등은 각 지역 교회가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가 각종 선교지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예배 시간이나 진행 방식, 찬양의 언어와 악기 사용 등에서 지역 특성을 존중하도록 권장하는 것도 이 같은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방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예루살렘 회의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둘째, 그는 “율법적 멍에”뿐 아니라 “세속적 방종”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주로 할례와 율법 준수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지만, 오늘날 교회 내부에서는 반대로 “은혜만을 강조하며 윤리적 책임과 거룩을 소홀히 하는 태도”가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가 제시한 ‘네 가지 금지’ 규정, 곧 우상 숭배와 음행, 목 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가르침은 구약적 음식 규정의 단순 반복이 아니라, “생명을 경시하지 말고, 하나님보다 앞서는 우상을 두지 말고, 자신과 타인의 몸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항구적 원리를 담고 있다. 현대에도 우상의 형태가 다양하게 변형되어 존재한다(돈, 권력, 물질주의, 자기중심적 욕망 등), 음행도 여러 디지털 매체와 물질적 풍요 속에서 더 교묘하게 파고든다. 목 매어 죽인 것을 먹는 문제나 피에 관한 규정은, 폭력적이고 잔인한 문화를 거부하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메시지로까지 확장 가능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자유케 하시는 은혜 안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윤리적 테두리”라며, 교회가 죄와 분별 없이 타협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초대교회의 영적 유산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구원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그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방종’을 허락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장재형 목사는 예루살렘 회의가 가져다준 결정적 전환점인 “보편적 선교 정신”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 15장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의 결정문을 가지고 이방 지역을 더욱 자유롭게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만약“이방인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결론이 났다면, 그들의 사역은 훨씬 더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교회가 지리적으로나 인구 통계학적으로 확장되는 것도 크게 제한되었을 것이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복음이 온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데 핵심적인 ‘해방 선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현시대에도 교회가 문화와 인종, 언어와 관습의 장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면, 예루살렘 회의가 보여준 정신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구원은 은혜와 믿음에 달려 있다”는 진리를 확고히 지키되, 비본질적 요소(문화, 예배 형태, 전통 등)에서는 최대한 폭넓은 수용을 통해 ‘모든 사람을 향한 복음’을 실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현대판 “에큐메니컬 정신”의 핵심이며, 교회가 분열과 갈등을 넘어 한몸으로 서기 위한 기본 전제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장재형 목사가 이끄는 여러 선교 네트워크나 교단, 신학교 등은 지역에 따라 예배 언어, 예식 형식, 성찬 방법 등을 다양하게 채택한다. 어떤 곳은 전통적인 예배 순서를 유지하기도 하고, 어떤 곳은 보다 현대적이고 젊은 감각의 예배 형식을 시도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예배와 공동체적 삶이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본질을 선포하는지, 성도들의 삶에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돕는지”라는 기준이다. 즉, 예루살렘 회의가 결정한 원칙대로, ‘네 가지 금지’와 같은 기본 윤리적 표준을 지키며 성령의 역사를 자유롭게 수용한다면, 어떤 문화적 표현 방식을 쓰든지 복음은 진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울러 장재형 목사는 한국교회가 예루살렘 회의 정신에서 배워야 할 점을 자주 언급한다. 한국교회는 급속한 성장과 함께 다양한 교파 분열과 내부 갈등이 일어났으며, 때로는 “우리만 옳다”는 폐쇄적 태도를 취하거나, 반대로 “아무거나 받아들여도 된다”는 식의 무분별한 개방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극단 사이에서, 예루살렘 회의의 “오직 은혜와 믿음, 그러나 거룩과 윤리를 지켜야 한다”는 균형은 큰 교훈을 준다. 한국교회가 과연 복음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문화적·시대적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가? 교인들에게 무거운 율법주의나 성과주의적 기준을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윤리적 규범과 공동체적 책임은 어떻게 세울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초대교회가 이미 보여주었다고 그는 말한다.
장재형 목사의 사역 현장에서는 이와 같은 질문들이 구체적인 프로그램, 교회 운영 원칙, 신학교 커리큘럼 등에 반영된다. 예를 들어, 교회 개척이나 선교사 파송을 할 때,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을 중심 메시지로 삼도록 지침을 준다. 동시에,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되, 성경적 윤리를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운다. 이는 곧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네 가지 금지 규정”을 시대와 문화를 넘어 재적용하려는 노력의 한 형태다. 실제로 많은 선교지에서, 토속 신앙과 혼합된 우상 숭배, 성적 물란, 잔인한 주술 의식 등이 발견되기도 하므로, 해당 관습을 무분별하게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음악, 의복, 식생활 문화 자체를 교회가 획일적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본질은 지키고, 비본질은 인정하는 태도는 곧 예루살렘 회의의 핵심 기조와 동일한 맥락이다.
현대 교회가 각종 매체와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함에 따라, 교회 공동체의 형태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디지털 환경에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왜곡 없이 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루살렘 회의와 갈라디아서가 보여준 “복음의 단순함과 순수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온라인상에서 수많은 정보를 소비하고, 여러 종교·사상들을 접하게 되면, 기독교도 그저 ‘많은 종교 중 하나’ 정도로 인식될 위험이 높다. 이럴 때 교회가 스스로를 어떤 ‘규칙’이나 ‘제도’로 차별화하려 한다면, 그것은 다시 율법주의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반면, “우리 교회는 아무 규범도 없고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라는 식으로 자유를 남용하면, 초대교회가 세웠던 거룩의 기준이 사라져 버린다. 장재형 목사는 이 두 극단을 피하려면, 예루살렘 회의가 남긴 원칙—“은혜로 구원받되, 윤리와 거룩을 지키라”—가 지금도 살아 있음을 교회가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에서 시작되어 갈라디아서, 로마서, 그리고 초대교회 전체로 뻗어간 구원론의 기초는, 2천 년 교회사 속에서 한 번도 약해진 적이 없다. 다만, 역사상 다양한 흐름(제도화, 정치화, 세속화 등)이 교회를 흔들 때마다, 교회는 이 원초적 복음의 힘에 다시금 의지하는 과정을 거쳤다. 종교개혁 시기 루터의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선언은 그 대표적 예이며,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중요한 잣대가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복음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그것이 곧“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 모든 언어, 모든 신분이 하나 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구원의 자유가 육체의 기회로 둔갑할 위험”을 아주 현실적으로 경고한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지적한 대로, 서로 물고 먹고 다투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참된 자유와 사랑을 실천하여,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며 “저들이 서로 사랑함을 보라”라고 감탄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복음의 열매이자 초대교회가 남긴 큰 유산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신학적 기초 위에서 다양한 실천 사역을 전개한다. 예컨대, 미디어 선교 플랫폼을 운영하여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최우선 메시지로 내세운다. 교회의 규모나 재정, 프로그램 성과 등을 내세워 우월성을 과시하려 들지 않도록, 교회 지도자들을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지도한다. 한편, 교회 내부에서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면(예: 지도자의 성적 타락, 재정 비리, 권력 남용 등), “오직 은혜”라는 명분으로 덮어버리지 않고, 예루살렘 회의가 제시한 ‘거룩과 책임’의 원칙에 따라 명확히 징계하고 회복 과정을 밟도록 지도한다. 이는 곧 초대교회가 지향했던 “자유 안에서의 윤리적 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며,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지향하려는 실천 방안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예루살렘 회의(사도행전 15장)는 초대교회가 지켜야 할 구원론의 본질을 선언했고, 갈라디아서는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며 율법주의를 강력히 배격했다. 로마서 역시 바울 신학 전반에 흐르는 “이신칭의”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풀어내어, 구원의 열쇠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임을 재확인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역사적·신학적 유산을 이어가려면, 먼저 율법주의와 세속적 방종 사이의 건전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구원의 문제에서 인간의 업적이나 제도를 앞세워선 안 되지만, 동시에 윤리적 무절제나 방종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 회의가 제시한 “이방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자유 선언과 “우상 숭배, 음행 등을 멀리하라”는 윤리 지침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고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중요한 원리다.
장재형 목사가 일관되게 역설하는 것은, 이 원리가 특정 시대나 문화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회가 어떤 지역에 뿌리내리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선포되어야 하고, 그와 동시에 “거룩과 윤리를 지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만약 교회가 외형적 성장이나 프로그램의 다양성으로 인해 ‘본질’을 흐릿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예루살렘 회의가 초대교회 때부터 지켜온 복음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중심으로 모여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의 영적 연합에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예루살렘 회의가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교회가 한때 “유대교의 분파”로 머물 뻔한 것을 넘어서,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열린 구원을 선언했다는 데 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그 구원론을 신학적으로 확고히 뒷받침함으로써, 율법이 아닌 은혜와 믿음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확립했다. 그리고 이 원리는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이어져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자신의 목회 및 선교사역을 통해 바로 이 사실을 실천하고자 한다. “구원의 본질을 놓치지 말 것, 교회가 윤리와 거룩을 무너뜨리지 말 것,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것.” 이것이 예루살렘 회의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현대 교회가 함께 공유해야 할 사명이라고 그는 말한다.
오늘날 교회가 매년, 혹은 매 시점마다 스스로 “우리는 여전히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원리를 지키고 있는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의 본질이 우리의 사역과 생활에 실현되고 있는가?”를 점검한다면, 복음은 계속해서 힘 있게 확장될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점검 과정에서 “진정한 에큐메니컬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문화적 차이, 교단적 차이, 신학적 스펙트럼은 존재할 수 있으나, 구원론의 기초에서 하나 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교회의 큰 힘이다. 이것은 전 지구적 복음 전파의 원동력이 될 뿐 아니라, 교회 내의 분열과 갈등을 해결하는 핵심 열쇠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과거 한 순간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가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지침서’와 같다.
장재형 목사가 제시하는 신학과 목회적 방향은 이런 모든 논의를 바탕으로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오늘에도 유효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예루살렘 회의가 이미 그 시초를 보여준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종종“예루살렘 회의가 없었다면 갈라디아서도, 로마서도, 그리고 2천 년의 교회사도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는 교회가 율법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막아낸 결정적 전환점이었으며, 세계 선교 역사를 열어젖힌 자유 선언이었다. 그는 이 선언을 계속해서 이어가면서, 교회가 제도나 형식에 갇히지 않고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도록 돕고자 힘쓰고 있다. 이로써 “인종, 문화, 언어, 성별, 사회적 신분 등 모든 구분을 넘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누리는” 보편적 복음이 실현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 장재형 목사의 사역 전반에 흐르는 주된 메시지다.
무엇보다도, 그가 말하는 복음의 보편성은 “구원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교회는 그 문지기가 되어선 안 된다”는 강력한 신학적 선언이다. 이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행 15:19)고 했던 정신과 정확히 일치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오히려 문턱을 높여놓고, 여러 의식을 거쳐야만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초대교회가 거부했던 율법주의의 재등장”이라고 진단한다. 교회는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하며, 그 대신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면서도 윤리와 거룩을 함께 붙들도록 권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초대교회의 생동감과 성령의 역사가 21세기 교회에도 계속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처럼 예루살렘 회의, 갈라디아서, 그리고 장재형 목사가 구현하고자 하는 현대 교회의 모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고리’로 연결된다. 구원론의 본질(오직 은혜와 믿음), 율법과 은혜의 관계, 그리고 현대 교회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방향성(보편적 선교와 거룩한 공동체)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위치한다. 이는 교회사가 증언하는 바와도 일치하며,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종교개혁, 그리고 21세기 에큐메니컬 운동까지 이어지는 장구한 흐름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단순히 지식 차원이 아니라 실제 목회 현장과 선교 무대에서 몸소 실행하려 애쓰고 있으며, 그것이 그가 “장다윗 목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지며 여러 공동체와 신학교를 개척, 운영해온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가 보여준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사도행전 15장의 결론대로, 구원은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고, 그 구원을 받은 이들은 삶에서 우상 숭배와 음행, 생명 경시에 해당하는 모든 악습을 버리고 거룩을 지키며 서로를 돌보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갈라디아서가 선포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는 어떤 문화나 시대, 국경의 장벽을 뛰어넘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보고, 모든 크리스천이 이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이 사명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예루살렘 회의가 이미 우리에게 선례를 보여주었기에,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며 세상 속에서 복음의 빛을 증거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은혜’를 변함없이 증언하며, 교회가 “유대인과 헬라인, 이방인과 모든 민족이 함께 어우러지는” 진정한 에큐메니컬 공동체가 되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