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 장재형목사

아래 글은 장재형(장다윗)목사의 로마서 3장 9-20절 강해 설교를 중심으로 사도 바울은 인간 모두가 죄 아래 있음을 선포하고, 율법과 은혜의 관계, 그리고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가르친다. 특히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인간의 실상이 얼마나 비참한 파멸로 이어지는지 분명히 밝힌다. 본 글은 로마서 3장 9-20절 전체 주해와, 시편·전도서·이사야서·창세기·노아 이야기·야곱의 예언·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 및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 그리고 야고보서 3장 등에 대한 연계 언급을 모두 포함한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구원의 필요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본문에서 강조되는 죄의 실체와 하나님을 떠난 삶의 파멸,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은혜를 선포하면서, 우리가 날마다 죄의 옷을 ‘빨아야’ 함을 역설한다. 


1.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음

로마서 3장 9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인간 모두가 죄 아래 있음을 분명히 가리키는 핵심 구절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1세기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아우를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믿는 자들을 포함한다. 이미 앞선 로마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은 이방인이 어떤 죄 안에 있는지를, 이어 유대인이 어떠한 죄 안에 있는지를 각각 밝히고, 이제 로마 교회 공동체 전체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다”라고 묻는다. 이는 구원받은 공동체, 곧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라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해설하면서,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동시에 “아직” 완전하게 성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늘 자각해야 함을 강조한다. 바울이 5장까지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칭의의 복음을 전한 뒤, 6-7장에서 성화의 과정을 설명하고, 8장에 가서 영화(榮化)의 소망을 언급하는 로마서의 구조 자체가 이를 보여준다. 실제로 7장 끝에서 바울은“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탄식한다. 이는 칭의받은 신자라도 여전히 죄의 찌꺼기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시다. 그 싸움 한가운데에 서 있는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이라면, “우리는 이제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니 죄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쉽게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죄를 경시하는 순간, 인간 안에 잠재된 죄성이 다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붙들기 시작한다”는 점을 단호히 지적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3장 9절 이하의 죄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안심하는 자들에게도 유효한 경고이며 동시에 교훈이다.

바울은 이어서 전도서 7장 20절과 시편 14편·53편, 그리고 예언서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방식은 랍비들이 즐겨 쓰던 ‘카라즈(charaz)’ 기법, 즉 진주 구슬을 실에 꿰어 놓듯 여러 구약 성경구절들을 하나로 엮어 논증을 강화하는 방법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시편과 예언서의 말씀을 연달아 인용하여,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미 너희가 익히 아는 그 말씀으로” 증거한다. 그 대표적 예들이 다음과 같다.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시편 14:1-3, 53:1-3)
  • “선과 악을 분별할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혀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
  •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며, 그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다”
  •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바울이 말하는 이 죄의 목록과 구조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실존을 고발하는데, 장재형목사는 이를 설명할 때 특히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한다. 첫째, 생각과 마음에서 출발하는 죄.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데서 죄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로마서 1장 28절에 등장하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는 구절과 정확히 맞닿는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가분(不可分)’인데, 인간은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살겠습니다. 나를 내버려 두십시오”라 말한다. 그 결말이 곧 ‘파멸과 고생’이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 누가복음 15장 탕자가 아버지 곁을 떠난 사건 모두가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교만에 뿌리를 둔다고 해설한다.

둘째, 생각과 마음에서 시작된 죄는 언어로 나타난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에는 독사의 독이 있으며,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이 썩으니 입에서 썩는 냄새가 나오고, 이것이 바로 인간 전부의 타락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야고보서 3장을 인용하며 혀가 지닌 파괴력을 강조한다.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인생 전체를 불태울 수 있는 불씨와 같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네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내라”고 강력히 말씀하셨는데, 이는 죄의 통로가 되는 눈과 손(행동), 그리고 그 안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혀(말)를 경계하라는 뜻이다.

셋째, 죄는 행동으로 이어져 발걸음을 좌우한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악을 향해 급속도로 달려간다. 장재형목사는 “죄를 짓는 데는 발걸음이 너무나 재빠른데, 선한 일에는 늘 머뭇거린다”는 아이러니를 지적하며, 우리의 발걸음과 행동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날마다 점검하라고 권면한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걸으신 길은 고난과 헌신의 길이었지만,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이익과 쾌락을 위한 길에 훨씬 빠르게 몰두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라는 문장은 하나님 없는 삶의 결론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장재형목사는 “이 길을 계속 고집하면, 인간은 영혼의 파멸과 영원한 고생을 피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덧붙여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을 “두려워함”(경외함)이 없는 것을 죄의 궁극적 증거로 해설한다. 시편 36편 1절을 인용한 바울의 언급, 곧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죄인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는 율법 없이 방종하는 이방인이나, 율법을 가졌으나 외식으로 흐른 유대인이나, 은혜를 알고도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교회 안의 누구든지 공통적으로 해당될 수 있다. 바울은 이처럼 전 인류가 죄 아래 있다고 무겁게 선포한 뒤, 곧바로 율법의 기능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 이 대목은 “결국 율법이 죄를 면제해주는 방패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으니 구원받을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율법을 가졌으면 그 율법의 내용을 전부 지켜야 하는데, 과연 지킬 수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율법의 긍정적 기능”과 “율법이 가진 제한” 둘 다를 분명히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율법은 죄를 억제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유익한 장치이긴 하나,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할 근본 수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의 “입을 막아”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로마서 3장 20절,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는 선포의 골자다.

이처럼 전 인류가 죄 아래 있다는 말씀은 단지 “절망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고개를 드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복음의 서막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이토록 자세히 “죄의 구조”를 밝혀낸 다음 곧장 구원의 길, 곧 ‘은혜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 로마서 3장 21절 이하의 핵심 주제임을 주목하라고 권면한다. 하지만 그 은혜를 참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되며, 날마다 ‘죄의 옷을 빨고(계 22:14 참조),’ 성령과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 이야기도 이를 잘 예표한다. 노아는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의인’이었지만, 구원 후에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는 수치를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함은 아버지를 덮어주었으나 도리어 저주를 받고 말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벗은 모습을 덮어주었는데 왜 저주인가?”라는 의문이 들지만, 그 내막은 함이 아버지를 조롱하거나 일종의 교만으로 바라본 데 있었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죄에 대해 날마다 깨어있지 않으면 노아처럼 또다시 죄를 드러낼 수 있고, 혹은 함처럼 교만 가운데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죄를 다루는 일에는 끝없는 경각심이 필요하다”고 정리한다.

한편,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예언 중 유다를 향한 말씀이 “포도주에 옷을 빨며”라는 표현을 통해 “거룩한 세탁”을 암시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유다는 장차 ‘홀(통치자의 지팡이)’을 쥐게 될 왕의 씨족으로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족보가 이어지는 지파다. 그 예표인 유다의 예언에 “옷을 포도주에 빨고,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매며”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신약에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포도주)로 우리 옷(의)을 깨끗이 씻는 ‘속죄’의 은유로 연결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날마다 예수의 보혈로 자신의 죄의 옷을 빨아야 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미 구원받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교단이나 성향을 비판하며, 오히려 끝까지 자신의 죄를 씻는 데 힘쓰는 자가 계시록 22장14절이 말하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덧붙인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불가분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그 관계가 깨졌다.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 없어도 괜찮다”며 어리석은 길로 가니, 그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게 된다. 눈으로 죄를 보고, 혀로 죄를 내뱉고, 발걸음으로 죄를 향해 달려가는 총체적 타락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장재형목사의 결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보혈을 붙들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이르기 전 단계로, 우리는 먼저“죄인임을 시인하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스스로 곤고함을 고백하고,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한 바로 그 모습이 신앙의 시작점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없으면 복음도 없다. 죄가 죄로 보여야 은혜가 은혜로 보인다는 점이 바로 로마서 3장 9-20절의 논지다.

특히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아버지 집에서 멀어져 자기를 방종하게 내버려두었던 장면,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탕자는 부친과의 관계를 단절했으나, 결국 절망의 끝에서 아버지를 다시 찾았을 때 구원을 경험했다. 반면 부자는 날마다 자신의 자색 옷과 잔치에만 몰두하여, 문밖에서 떨어지는 빵조각으로 연명하던 나사로를 외면했다가 죽음 이후 혀가 타는 고통을 받는 지옥에 던져졌다. 이 부자는 지옥에서 “내 혀에 물 한 방울만 찍어 달라”고 애원하며, 살아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 “너희도 이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사정한다. 이는 마음으로 죄를 선택하고, 혀로 죄를 범하며, 발걸음으로 죄의 길을 향하던 자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혀”의 역할을 짚어낸다. 혀는 선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악을 전파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우리의 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생명을 살리는 “영적 수레”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거짓과 저주로 다른 이를 망가뜨리는 “지옥의 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약 3:6). 부자와 나사로 비유 속 부자가 겪은 지옥 고통의 중심이 바로 “타는 혀의 갈증”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말과 혀가 죄와 구원 사이에서 얼마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지 깊이 숙고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첫 번째 소주제에서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길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향해 마음 문을 열 수 있다.


2. 율법과 은혜, 구원의 길

로마서 3장 19-20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한다. 이는 바울이 이제 본격적으로 “율법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을 선언하는 장면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의 소유자”라는 점을 근거로 자랑스러워했고, 그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을 가졌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데 있다. 장재형목사는“율법이든, 이성이든, 도덕이든, 인간 노력으로는 결코 죄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하며, 바울이 말하는‘은혜’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율법이 하는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죄를 깨닫게 한다(롬 3:20). 둘째, 죄를 억제한다(갈 3:19 참조). 율법은 사람들에게“이것이 죄다”라고 가르치고 경고함으로써 어느 정도 죄를 막아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뿌리 뽑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죄의 뿌리는 “하나님과 단절된 마음”에 있고, 이 마음의 교만과 어두움은 법조항을 지키는“행위”만으로는 근본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을 통해 내가 죄를 알았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오히려 죄가 더욱 왕성해지는 경험이 있었다”고 고백한다(롬 7:8-11). 이 역설은 인간의 부패함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율법이 가진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구원의 길은 어디서 열리는가? 바울은 3장 21절 이하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소개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가(轉嫁)됨으로써,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롬 3:22).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이 로마서의 핵심이자, 복음 전체의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은혜의 본질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공로나 자격이 아니라“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지해 믿음으로 붙잡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누구든 자랑할 수” 있겠지만(롬 3:27 참조),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사실상, 그리고 율법으로서는 죄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 없다는 전제에서, 오직 믿음만이 구원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해설하면서, 이는 인간 쪽에서의‘수용(受容)’이자 ‘신뢰(信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지만, 그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아멘”과 “예” 하는 응답이 필요하다. 이는 곧 복음 전도의 미련함을 통해서, 회개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는 과정을 통해서 역사한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5장 12절 이하, 곧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임했다”라는 바울의 논증이야말로, 이 문제를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단락이라고 덧붙인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복음의 원리가 여기서 확립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구원 이후의 삶이다. 구원받은 신자도 여전히 세상 가운데 살면서 “죄의 세력”과 싸운다. 노아가 홍수 이후 술에 취해 벌거벗은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는 순간 우리는 또 넘어질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6장과 7장에서 구원의 완성과정인 ‘성화’를 말하고, 8장에 가서야 비로소 ‘영화’를 언급한다. 장재형목사는 “칭의가 구원의 출발이라면, 성화는 구원의 여정이며, 영화는 구원의 완성”이라고 요약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

창세기 49장에 언급된 “포도주로 옷을 빤다”는 예언은, 장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속죄의 은혜를 상징하는 동시에, 이미 구원받은 자들도 끊임없이 자신을 ‘빨아야(깨끗케 해야)’ 함을 뜻한다. 계시록 22장 14절에 따르면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죄가 완전히 없는 자들만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예수의 보혈로 날마다 씻기 위해 애쓰는 자들을 가리킨다. 일부 교단이 “구원 이후에는 더 이상 죄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거나 “주기도문 중 ‘죄 용서’ 부분을 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전체가 말하는 구원·성화·회개의 핵심 정신과 어긋난다. 장재형목사는 “신자는 날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죄를 깨달은 자의 정직하고 온전한 태도”임을 역설한다.

더욱이 인간이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다시금 그 길에는 “파멸과 고생”이 기다린다. 노아 이후 인류가 또다시 교만해져 바벨탑을 쌓았듯이, 우리는 언제든지 은혜를 망각하고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럴 때마다“파멸과 고생”이라는 표현이 우리를 향한 경고등처럼 울리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파멸과 고생”이 단지 육신적 고난을 뜻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영적 파멸과 근원적 고통”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영혼이 겪게 되는 가장 심각한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평안(샬롬)을 누릴 수 있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는 절망과 황폐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야고보서 3장에서 혀를 경고하는 말씀도, 구원의 길을 걷는 성도들에게 계속 이어지는 주의를 요청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라는 구절은 혀가 잘못 쓰일 때 얼마나 큰 파괴력을 발휘하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혀가“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일 때에는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밝히는 능력이 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3장에 이어 야고보서 3장을 묵상해보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혀”가 “은혜 아래 있는 인간의 혀”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다고 강조한다. 교회 안에서도 혀로 인해 서로 상처 주고받는 경우가 많고, 때론 언어폭력이 육체적 폭력 못지않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새 언어”, “새 혀”로의 변화를 갈망해야 한다. 이는 율법적 기준을 넘어, “서로 사랑하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끝으로, 로마서 3장 21절 이하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율법 외에 주어진 하나님의 의”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성취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구원론의 핵심을 다시 강조한다. 바울이 2장과 3장에서 죄를 샅샅이 지적한 뒤 굳이 “율법이 아닌 은혜”를 말하는 것은,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며, 설령 외면적인 준수로 어느 정도 율법을 따라도 결국 마음속 죄까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마음의 문제로 끌어들여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도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다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간음”이라 하신 가르침은 모두 “죄의 뿌리가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따라서 구원은 외적 행위를 제한적으로 교정하는 ‘율법’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속죄’와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반드시 “죄인임을 시인하는 영적 회개”가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절규함으로써 자기 무력함을 고백했을 때, 비로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라는 구원의 찬양이 이어진다(롬 7:25). 이것이 신앙 여정에서 반복되는 원리다. 우리는 죄를 계속 발견하고, 다시금 예수께로 돌아가 용서와 능력을 입는다. 이 순환이 거듭되며 우리의 영혼은 점차 성화의 길을 걷는다.

결국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다”는 진술은 하나님 없는 인생이 맞닥뜨리는 운명이며, 동시에 “그 길에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간곡한 초청이기도 하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 속 지옥의 부자는 살았을 때 즐거움을 누렸으나, 죽음 이후에는 물 한 방울조차 허락되지 않는 절망에 갇혔다. 하지만 탕자는 아버지 집에서 멀어졌다가도, 그 길을 끝까지 가지 않고 “내 아버지 집에 돌아가겠다”고 회개함으로써 다시금 회복을 맞이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구체적으로 결론지으며, “지금 당장 돌이킬 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아직 숨 쉬는 동안 우리는 회개하고, 다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설파한다.

따라서 율법과 은혜, 죄와 구원의 길을 이해하는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지만, 그 자체로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한다.
둘째, 율법이 보여주는 죄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길을 찾되,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셋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도, 여전히 죄와의 싸움은 계속되므로 날마다 “포도주에 옷을 빨고(창 49:11 상징),”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혀”와 “발걸음”과 “눈”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애써야 한다.
넷째, 이 모든 과정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우리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겸손한 고백으로 그분 앞에 서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공동체가 이 로마서 3장의 죄론을 대할 때,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일에만 그치지 말고 주변의 영혼들을 살피고, 아픔 가운데 있는 이들을 향해 복음의 말을 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곧 혀를 통해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발걸음을 통해서는 “예수님이 걸으신 희생과 섬김의 자리”로 이동하며, 눈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영적 비전”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내부에 깊이 뿌리내린 죄성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은 그 죄성보다 더욱 크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는 이유이고, 우리도 같은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3장 9-20절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는 선언을 통해, 죄의 본질과 파멸적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다는 것은 곧 죄를 선택하고 하나님을 등진 자의 최후가 어떠한지를 단호히 보여주는 말씀이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반복해서 “구원받은 성도들마저도 ‘나는 나으냐?’라고 물으면 ‘결코 아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날마다 은혜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 그 율법을 온전히 지켜 의를 이룰 사람은 없으므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힘입을 수밖에 없다. 이 은혜가 임해야만, 우리의 마음과 언어와 행동이 새롭게 변하고, 결국 파멸과 고생이 아닌 평강의 길(샬롬)로 접어들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어떠한 지혜나 노력으로도 이룰 수 없는, 오직 성령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길이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이 본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죄만 정죄하기에 급급한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이 먼저 죄인임을 자복하고 회개하는 영적 갱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제자매를 살리고, 세상을 향해 생명의 복음을 제시하는 일, 곧 혀를 통해 말씀을 전하고, 발걸음으로 섬김을 실천하며,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태도가 회복될 때, “파멸과 고생”의 길에서 “평안과 기쁨”의 길로 옮겨지는 구원의 역사가 개인과 공동체 안에 충만해질 것이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3장 9-20절은 인간의 죄 실상과 그 비참한 결말을 낱낱이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난 길에서 돌이켜 은혜의 길로 돌아오라”는 선포를 한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메시지 역시 같은 초청이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죄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한 우리의 상태를 돌아보고,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을 씻자.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죄의 왕 노릇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파멸과 고생이 아닌 영광과 소망의 길’을 달려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본문이 담고 있는 결론이며, 율법과 은혜, 죄와 구원의 길을 이해하는 핵심 관건이다.